매춘부 몸값 깎던 부호의 손자, 자기 몸값 체불되자…
폴 게티 납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리들리 스콧의 블랙 유머
(*주의 스포일러 있음)

리들리 스콧이 20세기의 오래된 실화 폴 게티 손자 납치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다.

소년이 로마의 밤거리를 서성인다. 다가선 매춘부에게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어린 아이에겐 가격을 좀 깎아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1973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한 소년이 납치된다. 1,700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 받은 이 소년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10억 달러의 재산을 축적한 폴 게티의 손자 게티 3세였다. 당연히 지불될 것으로 여겨졌던 몸값은 할아버지인 폴 게티에 의해 거부되고, 인질범들은 게티 3세의 귀를 잘라 보낸다.

세상의 모든 돈이라는 제목을 달고 개봉한 영화 는 , 으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관을 선보였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새로운 영화다. 이미 거장의 칭호를 단 감독은 20세기의 오래된 실화를 끄집어 내, 돈에 관한 한 편의 블랙유머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돈이라는 매개를 중심에 놓고, 서로 다른 욕망과 질곡으로 얽혀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황을 전시한다. 누구도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부한 주제를 감독은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세련되게 보여준다.

납치된 16살의 게티 3세는 4개월간 이어진 협상 가운데 신체적 훼손을 받는다. 영화의 초반, 그는 매춘부들에게 가격을 깎아달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던 소년은 결국 몸값을 깎으려는 할아버지와 인질범들 사이에서 같은 논리로 희생되어진다.

게티의 어머니인 게일 해리스는 남편과의 이혼 소송에서 아이들을 얻는 조건으로 너무 쉽게 재산을 포기한다. 그러나 돈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아이들을 지키기에 그녀는 무기력하다. 인질범들과의 협상 속에서 그녀가 고통 받았던 것은 인질범들이 요구한 몸값이다.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그녀에겐 납치된 아들을 지킬만한 돈이 없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이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다.

게티의 어머니인 게일 해리스는 남편과의 이혼 소송에서 아이들을 얻는 조건으로 너무 쉽게 재산을 포기한다. 그러나 돈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아이들을 지키기에 그녀는 무기력하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인 폴 게티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최고 부자인 그에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돈을 달라고 한다. 그가 매일 아침 식사자리에서 겪는 것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이야기하고 돈을 보내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다. 인질범들 역시 부자 할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손자를 납치한다.

매춘부의 몸값을 깎으려 했던 게티 3세는 결국 최소한으로 협상된 몸값이 지불된 뒤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그의 귀는 잘렸고, 후유증으로 약물 중독이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게일 해리스는 그녀가 비웃었던 시아버지의 돈을 통해 아들을 구출한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폴 게티의 사망 후, 그의 재산 관리자로 임명되어 짓는 미소는 의미심장하다.

폴 게티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괴롭혔던 끝없는 돈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하나의 흉상으로, 그토록 집착했던 죽은 사물이 되어 그 가운데 전시된다.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이 아닌, 죽음이 선사한 흉상의 모습으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에게 그림을 팔던 이가 결코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했던 말을 이 장면에서 떠올리면 섬뜩하다. 폴 게티의 돈이란 박물관에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예술품이 아닌, 자신만의 공간에서 죽어버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돈을 욕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는 없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40여 년 전의 실화를 단지 돈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단순한 세계로 끌고 가 윤리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는다. 영화 초반, 로마로 초대되어 온 게티 3세의 가족은 콜로세움을 지나간다. 한 때의 영화를 간직한 채 몰락한 건축물은 그 자체로 영화의 상징이다.

쌓아올린 성이 거대할수록 몰락도 처참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폐허의 건물은 전시되고,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도 돈은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감독은 영화 를 통해 그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래서 망가진 콜로세움을 보면서도 환호성을 짓는 게티 3세의 모습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다.

◆ 김태훈은 음악을 듣고, 글을 쓴다. 방송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팝 칼럼니스트가 본업이다. 대부분 책을 읽고 이것저것 끄적이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2015년엔 김부겸 전 국회의원과의 대담집인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를 출간 했다. 틈만 나면 도심을 떠나 서핑을 즐기며 팟캐스트 ‘책보다 여행'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