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 시인·시집전문서점 주인

정오의 햇살이 조금씩 밀려 창틀 밖으로 사라진,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오후의 일이다. 잘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서점에 찾아왔다. 대개 그런 분들이 그러하듯 그는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서가로 다가갔다. 이제 나는 안다. 그는 쑥스러운 것이다. 서점을 찾아온 것도, 시집을 찾고 있는 것도.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가 나를 찾았다. "바쁘실 텐데 미안하지만, 시집 좀 골라주시겠어요?" 서점 주인에게 책을 골라 건네는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있을까. "어떤 시집을 찾으세요?" 이런 경우 대부분 말꼬리를 흐린다. "제가 시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러나 안심해도 좋다. 시를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어디에도 없다. 시인 역시 시가 뭔지 늘 고민하고 시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는 미심쩍은 듯 한편으론 안심한 표정으로 많이 허전하고 어쩐지 텅 빈 것 같아서 올해는 시집을 좀 읽어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봄날의책)를 건넸다. 시 서른 편이 실린 두껍지 않은 시집이다. 각각의 시 길이도 짧아 부담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그러나 그 속에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깊고 울창한 침엽수림이 있다. 하우게는 울비크(Ulvik)라는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정원사로 살았다. 그곳에서 나무의 깊이를 익히고 바람의 넓이를 배웠다. 이 배움에서 그는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것들에서 위대한 생명의 힘을 발견했다. 하우게는 진리란 별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지고 오듯/ 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지고 오듯' '이슬처럼 작은 것' 안에 있음을 노래한다. 보잘것없고 남들이 외면하는 것에서 힘을 발견한다. '꽃노래는 많으니/ 나는 가시를 노래합니다/ 뿌리도 노래합니다/ 뿌리가/ 야윈 소녀의 손처럼/ 얼마나 바위를 열심히/ 붙잡고 있는지요'라고 말하는 그의 시를 읽을 때 가슴 아래께부터 차오르는 생명력을 느끼는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한참 서서 시를 읽던 신사는 결국 하우게의 시집을 사 갔다. 희망해본다. 그가 하우게의 시를 통해 자신의 생활에서 활력을 찾아내기를. 먼 곳이나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안에서 반짝이는 빛에 눈뜨기를.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는' 어린 나무처럼 당당해지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밝은 얼굴로 다시 서점을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