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최악의 소프라노에 대해 들은 것은 몇 년 전 라디오에서였다. 시기는 가물가물하지만 채널은 똑똑히 기억한다. FM 93.1의 '노래의 날개 위에'서였다. 나는 93.1만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주 듣는 건 아니다. 30분 이상 운전을 하거나 집에서 멍하니 있을 때만 라디오를 틀기 때문에. 처음에는 4시에 하는 '노래의 날개 위에'에 꽂혔고, 그다음에는 2시에 하는 정만섭의 '명연주 명음반'과 9시의 '장일범의 가정음악'을 기다리게 됐고, 11시의 'FM 풍류마을'까지 좋아하게 됐다.

포스터 젱킨스. 이게 그 최악의 소프라노 이름이었다. 사상 최대의 음치로 악명이 높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진행자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음반을 틀었는데, 아… 93.1에서 들어본 적이 없던 유의 목소리가 나왔다. 발성이나 발음도 이상하고, 성량도 풍부하지 못하고, 내가 음악의 문외한이라 적확한 단어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하여튼 충격적이었다.

플로렌스 포스터 젱킨스. 혹자는 리듬감도 없고 음의 높낮이도 엉망이던 그녀를 “음악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성악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 여인의 애정은 ‘프랭크 시나트라 공연보다 더 큰 환호와 사랑’을 가져왔다. 모두가 재능을 말하지만 결국 진짜 중요한 건 ‘애정’. 일단은 애정 만세!

그런데 묘하게 좋았다. 마음이 들떴고, 웃음이 터졌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거다. 몇 소절 듣기도 전에 젱킨스의 목소리는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아마 그건 내가 음치이기 때문에, 리듬이나 박자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치부하고 말아버리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그렇게 강렬히 각인된 젱킨스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영화 '플로렌스'로였다. 플로렌스 포스터 젱킨스. 그게 그녀의 풀네임이었다. 젱킨스의 축약된 전기 영화 비슷한 작품이었다. 메릴 스트리프가 젱킨스를, 휴 그랜트가 젱킨스의 남편인 싱클레어를 맡았다.

이 영화는 2016년에 개봉된 모양인데 전혀 몰랐다. 내 취미가 휴 그랜트나 메릴 스트리프가 출연한 작품을, 놓쳤던 것들을 찾아보는 게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어찌나 다행인지! 나는 휴 그랜트를 아마도 사랑하고, 메릴 스트리프에게는 매번 경탄하게 되는 사람인데, 이 영화에 이 둘이 나오니 당장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작권료를 결제하고, 내 10인치 노트북에 재생했다.

처음부터 충격! 나의 '휴'가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데 너무 늙어버린 거다. 포시 악센트는 여전하지만. 이미 노화의 징후를 이런저런 출처로부터 봐왔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남들보다 빨리 생긴 주름도 휴의 매력을 형성하는 주무기이기는 했으나 주름은 너무 자욱했고, 검버섯도 있었다. 힝.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휴의 연기에 또 충격! 나는 늘 휴가 그 자신을 연기하는 유형의 배우라 생각했는데, 왕립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극을 연기하는 배우 같은 정극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수석급의 연기를. 휴 그랜트는 원래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런데 힘을 뺄 줄 알았고, 그런 식으로 헐랭이 연기를 해서, 나를 비롯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이 힘 빼기의 달인을 더욱, 마음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미 주름 따위, 검버섯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휴가 그의 연기 인생에서(어쩌면 실제 인생까지도 통틀어) 거의 생전 처음이지 아닐까 싶게 진실한 눈빛을 바치는 상대역이 메릴 스트리프, 그러니까 젱킨스인 거다. 이 영화에서 휴는 놀랍게도 순정파를, 헌신적인 남편 역을 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은 그 대상이 메릴 스트리프, 그러니까 젱킨스이기 때문일 거다. 메릴 스트리프, 그러니까 젱킨스는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휴 같은 뺀질이 유형의 남자라도 그가 추구하던 인생의 모토를 배신하고 격변, 저런 사랑둥이로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 메릴 스트리프님이시여. 연기의 신이시여. 이렇게 수시로 감탄하며, 나는 내가 배우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연기의 신이 연기하는, 음치 소프라노의 연기에 젖었다.

메릴 스트리프 같은 초초우등생이 (이를테면) 열등생의 연기를 하는 걸 보는 건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음악은… 음악은… 제 인생입니다"라고 수줍게 고백하지만 입을 벌려 소리를 내면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드는 그녀.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자신은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그녀, 젱킨스.

"음악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성악가로 유명하다." 위키백과의 그녀를 소개하는 두 번째 문장이다. 잔인하다. 또 이런 문장도 있다. "생전에 그녀가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면, 젱킨스는 음악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음의 높낮이나 리듬에 대한 감이 없어 보이며, 음표도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다." 아아.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젱킨스는 자신이 위대한 성악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음악을 듣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젱킨스의 이런 형편없는 실력에도 불구, 1944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은 대성황을 이뤘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공연보다도 환호와 사랑을 받았다는 신문 리뷰를 읽고 기뻐한다. 대중으로부터 받는 인기의 크기가 예술가의 성공 척도는 아니겠으나, 어쨌거나 젱킨스는 대성공을 한 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이 뭔지 생각했다. 대체 뭘까? 화려한 기교도 아니요, 얼마나 많은 레퍼토리를 외우는지도 아니다.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재능이란 것, 그게 뭔가요?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내 입장에서 말해보겠다. 나는 글을 못 쓰더라도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젱킨스가 음치임에도 노래를 불러야 살 수 있었듯이 나 역시 그런 사람인 것이다. 젱킨스는 혹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는 할 수 있어도 내가 노래를 안 했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휴를 보고 나긋하게 미소 지으면서.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젱킨스의 반주자 맥문의 말처럼 우리는 밥보다도 모차르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 음악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그녀의 재능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문학에 대한 내 애정의 부피와 질량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애정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내가 애정하는 것들로 인해 나는 성장해왔다. 여전히 내가 애정하는 것들은 속속 발견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애정을 기울일 대상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일단은 애정,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