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내부를 비추던 불빛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런웨이를 따라 다시 밝아졌다. 키 185㎝쯤 되는 이탈리아 남자 모델이 한국 디자이너 옷을 입고 등장했다. 칼라가 턱에 닿도록 높은 셔츠 위에 헐렁한 스웨터를 겹쳐 입었는데, 스웨터는 목에 걸어 한쪽으로 삐딱하게 늘어뜨렸다. 커다란 턱받이가 비뚤게 목에 걸린 형국이었다. 모델은 U자형 런웨이를 걸어나가며 시종 무표정했다. 개구쟁이가 옷을 입다 말고 나온 듯한데 표정이 없으니 기이한 느낌이었다.

지난 10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한국 브랜드 ‘비뮈에트’ 패션쇼에 등장한 의상. ‘수술대 위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수사에서 영감을 얻어 옷의 형태를 비틀었다.

지난 10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컨셉코리아' 패션쇼 풍경이다. 이 의상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비뮈에트' 브랜드의 서병문(38)·엄지나(36) 부부였다. 서병문은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수술대 위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란 수사(修辭)를 시각화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설명을 들으니 더 난해해진 이 패션쇼의 주제는 '기이한 아름다움'이었다.

500여 객석을 가득 채우고 일부는 선 채로 봐야 했던 이날 패션쇼는 피렌체의 남성복 박람회 '피티 워모(Pitti Uomo)' 중 일부였다. 서병문·엄지나 말고도 '비욘드클로젯' 브랜드의 디자이너 고태용(37)이 한국에서 참가했다. 고태용은 유니폼을 주제로 잡아 특유의 위트를 한껏 드러냈다. 교복·제복처럼 단정한 형태에 보라·분홍색과 반짝이 소재를 썼다. 넥타이를 벨트처럼 허리에 두르거나 말쑥한 재킷 등에 큼지막한 강아지를 그려넣어 제복의 권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이 디자이너들은 "난해하거나 황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패션을 통해 상상력을 드러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컨셉코리아’ 참가 디자이너들. 왼쪽부터 서병문·엄지나·고태용.

피티 워모 측은 이날 쇼를 인스타그램으로 생중계했다. 시청하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올리는 하트 모양 이모티콘이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메웠다. 현지 전문가들도 호평했다. 이탈리아의 패션 컨설팅 회사 '쇼룸 마르코나3'의 안토니오 롱고 매니저는 "강력한 디자인에 만듦새도 뛰어나다는 게 비뮈에트의 강점"이라며 "비욘드클로젯 역시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피티 워모의 이벤트 기획 총괄 프란체스카 타스코니는 "유럽 바이어들이 새로운 브랜드를 찾을 때 한국에 주목한다는 점을 실감하게 해준 쇼였다"고 말했다.

컨셉코리아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젊은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패션쇼다. 2010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한 컨셉코리아는 작년부터 남성복 쇼를 피렌체로 옮겨왔다. 피티 워모가 1000여개 브랜드와 3만명 넘는 관계자를 모으는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이기 때문이다. 남성 정장 중심의 행사였던 피티 워모는 최근 캐주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고태용은 "예전의 피티 워모였다면 캐주얼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을지 부담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신선해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