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아들이 보내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라디오였다. 외양이 60년대식이다. 재난 대비 필수품이라고 했다. 비상용 전등도 달렸다. 전기나 배터리 없이 태양광 또는 자가발전으로 작동한다. 다이얼도 손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 구식 라디오를 보면서 선친이 생각났다.

라디오는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다. TV는 구경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가장 좋아하셨던 프로그램은 민요와 만담이 어우러진 민요 노래자랑이다. 김용운·고춘자 만담을 즐겨 들으셨다. 근엄하셨던 어른 사랑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은 민요와 만담이 전파를 타는 날이었다. 그다음으로 즐긴 프로그램은 엄익채·한국남·안의섭(두꺼비) 박사 등이 나오는 '재치 문답'이었다. 시사 토론도 즐겨 들으셨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간밤에 라디오로 들으신 토론을 언급하시곤 했다. "방송에 나와 '의견 제출'하는 사람은 모두 식견이 밝은 훌륭한 사람이다. 방송국에 나가 국민을 일깨우는 일이야말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최고의 출세"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혁적 마인드'만이 한 맺힌 보릿고개를 이겨내는 힘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막내인 나는 아버지 임종까지 라디오 주파수를 잘 맞춰드리고, 머리맡에서 책과 신문을 읽어드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곁에서 "우리 아들 효자여" 하며 힘을 북돋아 주셨다.

선친이 돌아가신 후 내 글이 신문에 나오고,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KBS 서울중앙방송국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였다. 저세상에서 이를 아신다면 동네 어르신들 모아 막걸리 한 통 정도는 턱을 내셨을 것이다. 생시에 딱 한 번 그러신 적이 있다. 잡지사에서 내게 보내온 원고료(우체국 소액환)를 찾아서 드렸더니, 몇몇 유지에게 '귀한 돈으로 사 온 술'이라며 막걸리를 대접하셨다. 자식이 쓴 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액환이 어떤 것인지, 시골 노인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됐다. '자식이 글을 써서 돈으로 바꿔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뉴스거리였다. 나는 방송 출연도 했다. 그간 20회 넘게 나가서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또 경찰관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영혼은 영생(永生)'이니 저 세상에서 선친도 다 들으셨을 것이다.

아들이 보내온 라디오는 선친이 즐겨 듣던 만담도, 재치 문답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바른 말 고운 말'과 '일기예보'는 변함없이 나오고, 잠 안 오는 심야에는 '흘러간 옛 노래'도 구성지게 나오니 곁에 두고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