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공자 지음|김형찬 옮김|홍익출판사|424쪽|1만5000원

'논어(論語)'를 보는 눈은 주희(朱熹)가 사서(四書)의 하나로 포함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주희가 사서로 포함한 이후 버전, 즉 선비나 사대부의 마음 수양서 정도로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에 머물러 있다. 조선 500년 주자학 혹은 성리학의 영향이기도 하고 20세기 100년간 '논어'를 제대로 천착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왜 한국인들은 여전히 '논어'를 사랑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손에 딱 잡히지는 않아도 뭔가 있는 것 같은 인상 때문이 아닐까라고 여긴다. 그런데 우리 실상은 조금은 부끄럽다.

논어력(論語力)이라는 용어가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논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한·중·일의 논어력은 일본 한국 중국 순(順)이다. 중국은 문화혁명 및 근대 학문적 훈련의 지체 때문에 아직은 뒤처져 있다. 우리는 19세기 말부터 100년 가까이 우리 조상의 지혜를 내팽개치면서 '해석의 단절'을 겪었다. 반면에 일본은 학문적 단절이 없어 논어력에서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새해 선물하고 싶은 고전 1위로 '논어'가 뽑혔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독서 대중은 원하는데, 사실 우리 학계에 대중 눈높이에 맞게 그 내용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

공자는 서른 살에 이립(而立)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논어 공부 10년을 넘기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푸는 전문가를 만나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인격적 주체로 홀로 서는 것' 정도의 풀이에 머문다.

'논어'는 죽간에 쓰인 책이다. 그것은 엄청난 압축이 있었다는 뜻이며 이를 풀지 않으면 제대로 '논어'를 알 수 없다. 이립(而立)은 먼저 자기 자신을 세우고 나서 다른 사람을 세워준다는, 입기이립인(立己而立人)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글자만 따온 것이다. 당시 문자를 해독한 식자들은 이립(而立)만 봐도 입기이립인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압축된 글자들을 복원해낼 때 '논어'는 마음 수련서에 머물지 않는다. 서양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제왕학을 대표한다면 동양에서 그 자리는 바로 이 '논어'다.

혹시 '논어'의 맨 마지막 두 구절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결론이다.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고[不知禮 無以立],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

자기건 남이건 세우고 세워주는 것[立]은 예를 알 때 가능하며, 특히 다른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서도 사전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을 볼 줄 안다[知人]고 할 수 없다. 물론 그런 사람이 남을 다스려서는[治人] 안 된다. 그래서 '논어'는 제왕학인 것이다. 올해부터는 '논어'에 대한 제대로 된 사랑이 퍼져 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