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건 사회부 기자

지난달 29일 퇴근 시간 무렵, 몇몇 판사가 외부 컴퓨터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서초동 법원행정처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이 판사들은 법원행정처에 판사 뒷조사 문건이 있다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다시 조사하고 있는 법원 추가조사위원회 소속 판사들이었다. 추가조사위 판사들은 뒷조사 문건이 들어 있다는 의혹을 받는 전·현직 행정처 판사 컴퓨터 4대의 하드디스크를 달라고 했다. 이들이 온다는 것을 방문 직전에야 들었던 행정처 판사들은 깜짝 놀라 상부에 이를 보고했다. 잠시 뒤 윗선에서 '협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일부 행정처 판사들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추가조사위는 27일 컴퓨터 파일을 복원해 확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하드디스크를 확보하고도 '강제 개봉'까지 한 달 정도 걸린 것이다. 그간 법원 내에서 판사 동의 없는 컴퓨터 조사는 형법상 비밀 침해 등 위법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결국 강제로 컴퓨터를 열었다.

이날 추가조사위의 컴퓨터 개봉 작업은 컴퓨터를 썼던 판사들이 불참한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검찰이 압수 수색 영장을 통해 확보한 증거를 분석할 때도 당사자가 참관한다. 누구보다 절차를 중시하는 판사들이 검찰도 지키는 절차를 무시했다.

법원 내부에선 추가조사위 조사가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애초 이 의혹은 지난 4월 법원 진상조사위가 사실무근으로 결론 내린 사안이다. 이후 법관들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일부 판사가 재조사를 강력히 요구했고, 이 연구회 회장 출신인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까지 이 연구회 출신들이 관여하고 있어 공정성 시비를 낳고 있다.

추가조사위는 '재판은 곧 정치'라는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린 오현석 판사를 어떤 공지도 없이 기술자문위원으로 임명해 컴퓨터 개봉 작업에 참여시켰다. 오 판사는 올해 초 이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이탄희 판사와 같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추가조사위원 6명 중 4명도 이 연구회 소속이다.

추가조사위는 '강제 개봉' 대상인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법원행정처 소관 부서가 아닌 국제인권법연구회 핵심 멤버인 행정처 김영훈 인사총괄심의관에게 맡겨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봐도 조사가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믿기 어렵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특정 성향 판사들이 완장 찬 듯 밀어붙여 내놓은 재조사 결과는 법원 갈등만 키울 것"이라고 했다. 전례 없는 판사 컴퓨터 강제 조사를 놓고 앞으로 법원은 큰 내홍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그 책임은 재조사를 결정한 김 대법원장의 몫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