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산업1부 차장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홍타이지(청태종)는 한반도로 출병하기 직전인 1636년 12월 인조에게 국서를 보냈다. 이 국서에서 그는 공격 이유 중 하나로 '만주로 넘어와 인삼을 무단 채취해 가는 조선인을 조선 조정이 방치하는 것'을 꼽고 있다. 인삼 재배 기술이 없던 때여서 여기서 말하는 인삼은 지금 말로는 산삼이다. 같은 내용의 항의 국서를 청은 1633년부터 무려 다섯 번 보냈다. 당시 백두산 주변 조선인과 청나라인은 서로 국경을 넘어가며 인삼을 캤다. 상대국에서 잡히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인삼은 만주족의 주력 수출 상품이었기 때문에 홍타이지는 사활을 걸었다. 신생 국가 청은 불로장생의 묘약으로 통하던 인삼을 명에 팔고 국제 화폐였던 은(銀)을 벌어 부국강병을 이뤘다. 정사(正史)는 병자호란을 '쇠퇴하는 명을 못 잊은 조선을 짓밟은 청의 도발'로 규정하고 있지만, '인삼 전쟁'이 상징하는 동북아 경제 주도권 경쟁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중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 스프레드트럼 연구원들이 상하이의 연구개발 센터에서 반도체 성능 실험을 하고 있다. 중국은 종합 반도체 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설계 분야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현재 한·중 관계에 대해 100년, 200년 후의 역사가가 '미국과 여전히 친하게 지내려고 사드를 설치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라고 판단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인삼전쟁이 동시에 진행됐듯 지금 사드 갈등 옆에는 한·중 간 반도체 전쟁이 있다. 세계 1위인 한국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기 위해 중국이 조성한 펀드 규모만 110조원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뿐 아니다. 세계 원전(原電) 시장에는 한·중 원전 수주 전쟁이 있다. 자국 내 원전을 지은 지 오래된 선진국들은 만들 능력을 상실해 시장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노리는 한국과 중국이 공사가 나올 때마다 경쟁하고 있다. 공급 과잉으로 재편이 진행 중인 조선(造船) 시장에서는 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싼 인건비를 기반으로 중국 업체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호령하던 조선 강국 한국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가 또 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불안하다. 청이 대륙의 지배자로 서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은이 통용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국제 정치·경제 지형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군사와 무역 양측에서 총력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고, 농업만 강조했다. 심지어 1500년대 중반에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비단과 은을 거래하는 상인을 처벌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의 글로벌 흐름에 뒤처져도 한참을 뒤처졌던 것이다.

미국이 법인세를 낮추기로 하면서 전 세계에 감세 전쟁이 벌어졌지만, 한국은 오히려 올렸다. 이미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써본 독일·프랑스·호주는 시행착오를 겪고 축소로 돌아섰는데, 우리는 100조원을 넘어 얼마나 더 들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탈원전 정책을 시작했다. 프랑스·영국·일본은 공무원을 줄이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늘리고 있다. 이 정도면 뒤처진 게 아니고 거꾸로 가는 것이다. 흐름을 못 읽는지 외면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결과가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