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특파원

"대사관에서 기자가 전화하면 받지 말라고 했어요."

23일(현지 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의 한 교민은 "바라카 원전에 대해서 할 말은 많은데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UAE 교민 대부분이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가 수주한 원전과 연계된 사업을 하고 있어 대사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두바이 거주 한 교민은 이날 본지 전화 통화에서 "며칠 전 교민 사회에 '기자가 UAE에 취재하러 왔으니 입조심하라'는 말이 카카오톡 등을 통해 확 퍼졌다"면서 "다른 교민에게 전화해도 별 얘기는 못 들을 것"이라고 했다.

UAE 교민 사회는 바라카 원전 문제 등으로 뒤숭숭했다. 한 교민은 "몇 달 전부터 한국 식당에 가보면 다들 식사 자리에서 '바라카 원전 문제'를 빼놓지 않고 얘기한다"면서 "탈원전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와 UAE의 관계가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고 결국 교민의 '먹거리'도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우리 외교부와 UAE 한인회 등에 따르면, 한·UAE 교역은 MB(이명박) 정부가 2009년 12월 바라카 원전 사업을 수주하고 이어 박근혜 정부가 이 원전의 60년 운영권을 확보하면서 군수물자·자동차 등 여러 분야로 확대됐다. UAE 교민 수도 2008년 말 약 3700명이었으나 바라카 원전 수주를 계기로 건설업을 비롯해 숙박·물류·운송업체가 물밀듯 들어와 2년 만에 8000명을 넘었으며 현재는 1만5000명에 달한다.

교민 사회의 불안은 최근 원전 관련 사업체 일부가 하나둘 철수 움직임을 보이면서 커지고 있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바라카 원전 1·2호기 건설 현장의 중장비 운송을 맡았던 한 한국 업체는 최근 원전 3·4호기에 대한 사업을 수주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외국 업체에 밀렸다고 한다. 이 업체는 두바이 지점만 남기고 아부다비 지점은 철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전 관련 한 중소업체 관계자는 "청와대는 원전 사업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공사 대금을 제대로 못 받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현대건설이나 삼성물산같이 몸집이 큰 기업은 적자가 나도 버틸 수 있지만, 전기 시설 설치 등을 하는 중소업체 중에는 대금을 못 받아 도산하거나 철수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한 교민단체 관계자는 "분위기가 안 좋던 차에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UAE를 왔다가 가서 '진짜 양국 간에 무슨 문제가 있구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됐다"면서 "임 실장의 UAE 방문 이후 교민 사회가 더 뒤숭숭해졌다"고 했다.

UAE 주요 인사들 앞에 선 駐韓대사 - 지난 20일 압둘라 알 누아이미(오른쪽 사진) 주한 아랍에미리트(UAE) 대사가 아부다비 에미리트 전략 연구 센터에서 ‘UAE와 대한민국 간 무역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 강연회에는 이 나라 정·관계 및 경제계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왼쪽 사진).

[임종석 UAE 의혹 "LNG 때문" 설도]

[청와대, 언제까지 전 정부 탓만 할건가]

임 실장의 UAE 출장 열흘 만인 지난 20일, 압둘라 사이프 알 누아이미 주한(駐韓) UAE 대사는 본국으로 일시 귀국해 다시 한 번 긴장감이 감돌았다. 임 실장이 UAE 방문 때 만났던 왕세제(弟)의 조카가 지난 19일 갑자기 한국에 입국해 이틀을 머물고 있을 때였다. 누아이미 대사는 이날 아부다비의 한 전략연구소에서 UAE 주요 기업인과 정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MB 정부가 UAE와 체결한 각종 에너지 사업을 열거하며 양국 경제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특별 강연을 했다. 그는 이날 "UAE와 한국은 2009년 바라카 원전 사업 체결로 특별해진 관계"라며 "한국은 UAE에서 석유 개발 사업도 하고 있다"고 했다. 양국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가 직접 날아와 설명해야 할 정도로 UAE 내부의 한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누아이미 대사는 당시 주변에 "휴가를 간다"고 하고 비밀리에 귀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소식통과 정부 관계자 등은 UAE와 문 정부의 관계에 적신호가 들어온 배경에는 탈원전 정책과 아크 부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UAE 원자력공사(ENEC) 관계자에 따르면, 바라카 원전은 석유 의존도가 높은 UAE가 '포스트 석유 시대'를 대비해 추진하는 국가 핵심 프로젝트다. UAE 정부는 바라카 원전으로 국가 전체 전력 수요의 25%를 충당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내부적으로 원자력 전문가를 육성하고 선진국으로부터 원전 운영 노하우 등을 배우는 등 이 분야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 이란이나 예멘 반군의 미사일 공격 등으로부터 원전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해 걸프 아랍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도입해 배치하기도 했다.

UAE는 2009년 바라카 원전 사업과 향후 운영권을 프랑스에 맡기려고 했다가 원전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약속을 믿고 막판에 한국에 원전 사업권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런데 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탈원전을 선언하자 UAE 정부 내에서 불안감과 배신감이 커졌다고 한다. "'원전은 나쁘다'고 외치는 나라에 국가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한국은 5년마다 정부가 바뀌면 원전 같은 국가 안보 정책도 180도 뒤집히니, 이 나라에 장기 프로젝트를 맡기는 건 부적절하다"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현지 소식통들은 전했다.

UAE에 파병된 아크 부대와 관련한 갈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크 부대 소식에 정통한 우리 군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는 양국 군사 관계를 강화하고 방산 수출도 늘리고자 아크 부대의 규모를 확대하고 파견된 군사고문단의 수준도 격상하는 방안을 UAE에 제안했는데, 문 정부가 이를 일방적으로 철회했다"면서 "한국이 먼저 협력안을 제안해놓고 정권이 바뀌었다고 안 하겠다고 하니 UAE가 황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는 UAE는 시아파 맹주이자 군사 강국인 이란과 친이란 무장단체 예멘 반군으로부터 안보 위협을 받고 있어, 군사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관계자는 "UAE를 비롯한 아랍의 왕정 국가는 정권이 바뀌지 않는 정치적 체제의 특성 때문에 안보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책은 10년 이상 일관되게 추진된다"면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다른 나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이전 정부 정책을 틀어버리면 국익에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