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경북 성주군 소성리를 찾았다. '사드 배치에 따른 보상'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 장관은 정작 주민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석주 소성리 이장(里長)이 "주민들이 거부했다"는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김 장관을 대신한 채홍호 행안부 지방행정정책관(2급)이 겨우 이 이장을 만나 보상책을 논의했다. 일부에서 "이장 자리가 고위 공직자급이 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예전 이장은 마을 잔심부름을 처리하고 공무원을 상대로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귀찮은 자리였다. 이제는 때로 대규모 지역 사업에 영향을 주는 자리가 됐다. 대규모 공공기관 사업은 기획재정부로부터 예산을 받기 위해 반드시 예비타당성 조사의 하나로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거쳐야 한다. 주민 여론을 좌우하는 이장은 지역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거쳐야 하는 문지기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고령화로 마을 노인들이 이장에게 마을 일 처리 권한을 전면 위임하면서 이장에게 '권력 쏠림'은 더 심해지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주민 박모(65)씨는 "오죽하면 '이장 도장 하나가 마을 전체 목소리'란 농담이 오갈 정도"라고 말했다.

고령화한 시골에서 이장은 주로 젊은 사람이 맡았다. 요즘엔 이장이 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올해 초 충북 옥천군의 한 마을에선 이장 선거가 열렸다. '소통하고 화합하는 이장(里長)' 등 선거 현수막이 걸렸다. 경쟁 후보는 프로필을 담은 선거 벽보를 붙였다. '술 마시는 문화 개선' '경로당 확충' 등 공약 대결도 펼쳤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행여 있을지 모를 선거원 간 갈등 방지를 위해 선거관리위원회까지 꾸려졌다.

각종 고발전에 따른 갈등과 송사도 불거지고 있다. 지난해 충남 서산시 대산읍에서는 이장 출마를 위한 자격 요건인 마을 전입 기간 2년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졌다. 이장 당선인 거주 기간이 이에 못 미치는 1년 10개월이라며 투표에서 차점을 기록했던 상대 후보가 이의를 제기해 당선 자체가 취소됐다. 경북 영양군에서는 이장 선거를 앞두고 현 이장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낯 뜨거운 소문이 퍼져 "연임을 방해하려는 음모 아니냐"며 주민 간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처우도 좋아져 '이장은 무보수 명예직'도 이제는 옛말이다. 지자체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한 달 20만여원 기본 수당은 물론 명절 때마다 200% 상여금을 받고, 월례 회의 참석 때도 수당 등이 꼬박꼬박 나온다. 지역에 따라 자녀 장학금이나 해외 연수, 직무 교육 기회를 얻기도 한다. 충북 옥천군의 한 관계자는 "혜택과 권한이 늘다 보니 갈수록 이장 평균 연령이 낮아지고 경력이 쟁쟁한 이장도 등장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 경남 거창군 주상면 내오리 오류동은 통영시와 진주시 부시장을 역임한 고위직(2급) 공무원 출신이 이장을 맡고 있다.

세진 만큼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달 충남 부여경찰서는 부여군 옥산면의 이장과 마을 간부 대여섯 명이 허락 없이 마을 인근에 묘지를 쓴다는 이유로 마을에 장례를 치르러 왔던 유족의 장의차를 가로막고 통행료를 요구한 혐의(공갈 미수 등)로 기소 의견 송치했다. 이들은 또 마을 공사를 맡은 태양광발전소 업체에 '마을 안길 이용료' 3500만원을 요구해 사적으로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 4월에도 충남 금산경찰서가 국가보조금으로 구매한 농기계를 주민에게 돈을 받고 빌려줘 주머니를 불린 혐의로 전 마을 이장 장모(77)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전문가들은 "높아진 권한만큼 이장 선출 방식이나 임기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는 지자체별로 이장 선출·임기 규정이 다르고 아예 과거 중범죄 경력 조회 등 이장의 결격 사유에 관한 규정이나 연임 제한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장 당선인의 자격 요건 문제가 불거지거나 반대로 30년 이상 장기 집권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순번제나 마을 원로가 추대하는 깜깜이 이장 선출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지자체별 정관으로 이장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내부뿐 아니라 외부 전문 인사도 이장으로 추천·공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장들의 전문력 제고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해 '좋은이장학교'를 개설한 옥천군 동이면의 박효서 이장협의회장은 "전임자 인수인계를 원활히 하고 이장학교 등 이장의 전문성과 윤리 의식을 교육하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