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맨발로 밤거리를 떠돌던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그어 불을 밝힙니다. 남의 집 유리창을 통해 엿본 따뜻한 벽난로와 크리스마스트리를 눈앞에 불러냅니다. 하지만 손을 뻗는 순간 불은 꺼지지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성냥을 품고 삽니다. 그러나 성냥불은 짧고 겨울밤은 너무 깁니다. 길고 혹독한 겨울밤을 견뎌낼 진짜 지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홍여사 드림

부모 자식 간도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주고받기)'야! 엄마는 자주 그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엄마한테서 그 말을 듣는 순간이 저는 그렇게 싫었습니다. 엄마는 그 말을 본인 편리할 대로 썼거든요. 자식에게 바라는 게 있을 때도 그 말부터 꺼냈고, 서운함을 표현할 때도 그 말로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자식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때도 그런 이유를 댔죠. 준 것만 기억하고 받을 기대만 하던 엄마는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말 뒤에 꼭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릴 때는 다른 집 엄마들도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몸살감기라도 들면 엄마 힘들게 한다고 야단부터 치고, 수험생 아들보다, 야근하고 들어온 남편보다 본인의 변덕스러운 기분 변화가 더 중요했던 엄마. 이혼하자는 말, 집 나가겠다는 말,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면서 갖고 싶고 원하는 건 누구보다 많은 여자. 그게 엄마들의 보통 모습인 줄 알았어요.

우리 엄마가 여느 엄마와는 다르다고 느낀 건 아버지가 편찮으시고부터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에 일만 열심히 해오신 아버지는 아직 한창나이에 중한 병을 얻으셨죠. 1년 조금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 어려운 시기를 엄마는 감당 못했습니다. 남편의 고통보다도 본인이 받은 충격과 혼란 때문에 스스로 몸져누웠습니다. 아버지 간병은 오빠와 제 몫이 되고 엄마는 본인의 우울증과 섭식장애 치료에만 매달려야 했죠.

아직 철이 없어, 아버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어떤 시도도 못 해보고 저희는 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그 뒤로 엄마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20대 초반인 자식들에게서 보호받고 대접받고 위로받기를 바랐죠. 그럴 때면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말을 제가 엄마한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제발 엄마도 주위를 돌아보고 곁의 사람에게 뭔가 내어줄 생각을 해보라고.

그래도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저는 엄마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화가 나면서도 조금은 짐작도 되고 예측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그것조차 안 되었나 봐요. 도무지 대화가 안 되었으니까요. 결국 결혼을 계기로 엄마로부터 멀어져 갔죠.

오빠에 대한 엄마의 배신감은 말로 못 해서 그 푸념을 제가 다 들어야 했지만, 저는 잘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상황에 며느리까지 등장하면 얼마나 분란이 많았겠어요? 결국 가장 만만한 딸이 엄마의 마지막 가족이 되어 남았죠. 우리 모녀 관계는 꽉 닫힌 방 같았어요. 그 방 안에서 엄마가 나를 학대하고 있는지 내가 엄마를 학대하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안 됐습니다.

결국 저는 제 인생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른 살에 만난 남자친구와 2년 사귀고 결혼을 결심했죠. 물론 엄마는 저의 결혼을 못마땅해했지만 저는 묘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남자친구 가정은 우리 집과 달리 더없이 평범하고 화목해 보였거든요. 저는 마치 그 행복한 가정에 입양이라도 되는 기분이었죠.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다던가요? 저한테도 그런 말을 해주는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딸이 별건가 싶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서로 상처 주기 시작하면 남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게 모녀간이었으니까요.

저는 노력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우리 시어머니에게 딸 못지않은 며느리가 되어드리도록 말입니다. 비록 낳아주신 분들은 아니지만 어른들에게서 사랑과 인정을 받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저도 한 번 그런 기쁨을 누려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를 '엄마'라 불렀습니다. TV에서 그런 장면을 볼 때는 낯 간지럽다 느꼈었는데, 제 입에서 그 소리가 넉살 좋게 잘도 나오더군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격상 시부모님과 가까워지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에 저로서는 마음을 다잡았던 겁니다. 손위 시누이들에게도 언니, 언니 부르며 제 쪽에서 다가갔습니다. 워낙 사랑받고 자라서 그런지 유쾌하고 솔직한 그녀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면서요.

남편은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데이트할 때는 애교 한 번 부리지 않던 제가 가족들에게는 립서비스에 이벤트까지 아낌이 없었으니까요.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분들과 함께 있는 게 싫지 않았습니다. 식구들 사이에 흐르는 스스럼없고 따뜻한 정이 보기 좋았습니다. 시부모님이 자식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하지 않으셔서 존경스러웠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식들 역시 부모님을 부담스러워 않고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강요된 부채의식이 없으니까요.

정말 부러웠고, 이런 집에 며느리로 들어온 것이 저의 복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저도 그들 사이에 끼고 싶었죠. 딸 같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사는 동안 엄마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거리를 두려고 해도 안 되더니 든든한 시집식구가 생기니 자연히 멀어지더군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고 세월은 저에게 쓰디쓴 깨달음을 안겨줄 뿐입니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나에게 더 이상 엄마는 없다는 겁니다. 친엄마도 좋은 엄마가 아니었지만 시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에게 처음 맞은 날, 시집으로 달려갔더니 시엄마는 말씀하셨죠. 네가 오죽 약을 올렸으면 그 순해 터진 애가 손질을 했겠니? 남편이 집을 나가 며칠 연락이 안 될 때도 시엄마는 그러셨죠. 어째 너는 남자 비위 하나 못 맞추고 밖으로 몰아내니? 들어오면 무조건 빌어라. 시누이와 저 사이에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때도 시엄마는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랑 걔랑 같니? 살아온 수준부터가 다른걸….

시부모님은 교양 있는 분들이고, 시누이들은 매력적인 여성들이지만 저의 진짜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브 앤드 테이크. 일정한 거리를 뒀어야 할 대상이었죠.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갖은 몸부림을 치던 제 모습이 애처로울 뿐입니다.

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엄마가 밉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게 친엄마라면 내게는 좀 더 따뜻하고 굳건한 엄마가 필요했습니다. 정에 목말라 남의 집을 기웃대지 않도록 단단히 손 붙들어주는 엄마가….

물론 압니다. 이제는 저 자신이 어른이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을요. 사랑받는 딸이 아니라 좋은 엄마가 될 생각을 해야 하겠죠. 머리로는 아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생전 받지 못한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기브 앤드 테이크를 넘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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