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장에는 책장을 그린 병풍이 한 폭 있다. 책가도(冊架圖)라고 한다. 귀한 책들을 꽂은 서가를 그린 그림이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책들 사이에 문방사우(文房四友) 또한 그려 넣었다. 사진은 20세기 초 창덕궁 세자 침실에 있던 책가도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 이후 유행한 그림이다. 그린 사람은 알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왼쪽 아래 공작새 깃털을 꽂은 꽃병이 보인다. 녹색이다. 화병 가운데는 회색으로 둘러놓았다. 그 오른쪽 위 칸에는 빨간 찻잔과 갈색 주전자가 보인다. 그 오른쪽 아래 칸에는 정교하게 만든 물고기와 역시 빨간 찻잔이 보인다.

이상하지 않은가. 백의민족이요 희디흰 백자를 사랑하는 질박한 조선 사대부, 왕실 병풍에 요사스러운 총천연색 그릇이 그려져 있다니. 결론은, 이 요사스러운 그릇은 모두 '메이드 인 차이나'요 '메이드 인 재팬'이다. 그 비밀을 풀어본다.

황제의 하사품, 청화백자 1428년 명나라 황제 선덕제가 청화백자를 세종에게 하사했다. 청화안료로 용을 그린 항아리였다. 청자보다 선진기술로 만든 백자에 왕실은 매혹됐다. 조선은 청자 대신 청자에 흰색 유약을 바른 분청사기를 만들던 때였다. 그런데 20년 뒤인 1448년 왕실에서는 중국과 자기 무역을 금지했다. 명나라가 청화백자 유출을 금한 탓이다. 막막해진 왕실에서는 백자를 만들 백토(白土) 채굴과 백자 제조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19세기 말 제작된 책가도. 창덕궁에 있던 그림이다. 정조 때 시작된 그림으로, 양반집과 왕실에서 유행했다. 검약을 강조하고 사치를 배격한 성리학의 나라에서, 자세히 보면 조선 백자 대신 수입산 중국제, 일본제 채색자기가 책장 곳곳에 그려져 있다. 조선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이다.

고려청자 노하우가 있던 나라인지라, 백자 기술은 순식간에 개발됐다. 그리고 1467년 민간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뒀던 도자기를 왕실이 직접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됐다. 관요를 관장하는 관청은 사옹원(司饔院)이고 책임자인 도제조는 왕족이나 의정부 정승이 겸임했다. 백자를 장식하는 파란 안료는 100% 수입품이었다. 고가(高價)였다. 왕실은 민간에게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했다. 청화백자 생산은 국가가 독점했다. 명나라가 안료 수출을 금지하자 관요에서는 그릇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올록볼록하게 그림을 새겨넣기도 했다.

생산은 물론 소비도 국가가 독점했다. 성종 때 완성된 헌법 경국대전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청화백자를 사용하면 곤장 80대.' 좋은 그릇 맛을 본 사람들은 중국에서 밀수입한 청화백자를 즐겼다. 마침내 어전회의에서 이런 논의가 나온다. "중국의 물건은 저절로 올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수송해 오는 자가 있을 겁니다. 청컨대 엄히 금하소서."(1477년 성종실록 8년 윤2월 10일) 조선백자를 조선 백성들은 구경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제조업

본은 농업이고 말은 상업이다.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한다는 뜻이다. 상업을 억제한 이유는 아주 명쾌하다. "상업은 도둑질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금해야 합니다."(1518년 중종실록 13년 5월 28일)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백성들이 다 같이 풍성한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1783년 정조실록 7년 1월 1일)

농부(農)는 학문하는 선비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직업인이다. 공인(工)은 필요에 의한 기물만 생산하는 천민이다. 상인(商)은 사치를 부르는 천박한 업종이다. 성리학이 추구하는 도덕 사회에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은 악(惡)이라는 논리다. 조선 개국부터 멸망까지 일관된 경제정책이었다. "여러 고을에서 매월 두 차례 시장을 여는데,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는 것이라 금지시켰다"고 전라관찰사 김지경이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호조판서가 왕에게 이리 권한다. "청컨대 다시 관찰사로 하여금 엄중히 금단하게 하소서."(1472년 성종실록 3년 7월 27일)

경기도 양평 팔당호수. 건너편이 조선 도공들이 땀을 흘린 조선 관요 분원리와 금사리 요지다.

성리학 원조인 중국에서 직업 분류로 쓰였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조선에서는 신분 차별로 바뀌었다. 조선의 최첨단 산업, 도자기는 그리하여 민간 제조도 유통도 금지됐다.

왕실 그릇공장 관요는 고품질 백토와 수입 청화안료와 도공을 독점했다. 사옹원에서 내린 시방서에 따라 백자를 생산했다. 지시한 대로 만들면 그만이니 창의성보다는 관성과 타성이 작용했다. 천한 도공 신세를 면할 수 없으니 의욕은 없었다. 민간에서는 저질 흙과 흔한 안료로 철화백자와 진사백자를 만들었다. 왜란과 호란 이후 나라가 가난해지면서 관요에서도 철화백자를 생산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서야 관요에서는 청화백자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다.

영조의 등극과 反사치법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2년 뒤 3대 국정지표를 발표했다. 계붕당(戒朋黨), 당파싸움을 금했다. 둘째 계사치(戒奢侈)다. "면백(綿帛)도 따뜻한데 어찌 꼭 비단으로 수놓은 옷(錦繡)인가?" 마지막으로 계숭음(戒崇飮)이다. 금주령이다. "술은 미치게 하는 약(狂藥)이다.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기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술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술을 금하면 민생이 안정되고 직무를 거행할 수 있으리라."(1726년 영조실록 2년 10월 13일) 우의정 조도빈이 한마디 붙였다. "서민의 처첩(妻妾)들도 비단옷을 보통으로 여기니 먼저 궁중에서 검소함을 따르면 감화되리이다."

술 항아리 때문에 사형

1733년 12월 21일 영조는 왕실 비단 생산을 금지했다. 비단을 생산하는 기계를 폐기시키고 ‘다시는 재론하지 말라’고 명했다.(비변사등록) 비단 생산기계 이름은 문직기(紋織機)다. 금실로 무늬를 넣는 기계다. 이 기계가 폐기됨으로써 금사(金絲) 기술은 2015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복원할 때까지 282년 동안 조선에서 사라졌다. 1746년에는 중국산 무늬 비단 수입도 금지했다. 1756년 부녀자들 가채(加髢)를 금하고 족두리를 쓰라고 명했다. ‘사치가 성하여 부인들이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으므로 임금이 금지했다.’ 영조에게는 ‘혼인 못 하는 것도 사치, 장례 못 치르는 것도 사치, 제사를 홀대하는 것도 사치 탓’이었다.(영조실록 32년 1월 16일) 영조는 “사대부 집에는 모피 이불과 이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며 “내가 무병함은 옷과 음식이 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사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경기도 광주 분원리 가마터에 있는 비석군. 관요를 관리한 벼슬아치들 선정비다.

1755년 영조는 금주령을 강화한다. 영조는 ‘식혜는 예주(醴酒)라 하여 술이니, 이를 제사상에 술 대신 올리라’고 명했다.(영조실록 31년 9월 8일) 1762년 9월 함경도 북청 병마절도사 윤구연이 금주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윤구연의 집에서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가 발견된 것이다. 영조는 크게 노하여 그달 17일 남대문에 가서 직접 윤구연 목을 베었다(上大怒 親御南門 斬九淵). 이를 말리는 세 정승은 파면했다.(영조실록 38년 9월 17일) 그 누구도 대놓고 사치를 부리거나 술을 즐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본의 OEM공장 초량 부산요

인조 16년인 1638년 부산 용두산 아래 도자기공장이 설립됐다. 80년 동안 운영된 이 공장 이름은 부산요(釜山窯)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교역을 재개하면서 만든 초량왜관 내에 있었다. 지금 로얄호텔 자리다.

그런데 이 부산요 사장은 대마도에서 온 일본인 도공이었고, 직원은 조선인 도공이었다. 일본인은 그림·조각·불을, 조선 기술자는 그릇 성형을 맡았다. 다기에 대한 일본 수요가 폭증하자 일본인 감독관을 보내 조선인 기술자 손으로 만든 다기다. 디자인도 수량도 모두 일본이 결정했다.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냈던 주문서에는 그릇 크기와 높이, 유약 색깔까지 세밀하게 표시돼 있다. 한 우두머리 도공은 조선인 기술자, 역관들과 갈등 끝에 자살하기도 했다.

부산요에서 생산한 그릇은 분청사기다. 조선 초 대량생산했던 그 그릇이다. 왕실이 청화백자를 관급 그릇으로 규정하고 관요에서 이를 독점생산한 이래 조선에서는 폐기된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을 발전시켜 일본은 이도다완을 비롯한 첨단 자기를 생산했다. 유럽에서 중국 자기가 유행하면서 일본은 중국풍 도자기도 생산했다. 일본과 중국 채색 자기는 유럽으로 대량 수출됐다. 조선 도공을 납치할 정도로 열악했던 일본 도자기가 산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성리학의 위선

경기도 광주 곤지암 관요터에서 나온 그릇 받침대. ‘손맜소니’라는 도공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 이상 국가 건설을 위해 내놓았던 각종 규제를 뒤집어본다. '영조가 마침 송절차(松節茶)를 마신 터라 약간 취한 채 말하였다.'(성대중, '청성잡기') 송절차는 스스로 금주를 실천한 영조가 술 대신 즐겨 마셨던 차다. 그런데 취했다? 임금이 송절차를 가져오도록 명하고 말했다. "경들이 한 잔씩 나에게 권하도록 하라." 홍봉한이 말했다. "남은 것을 맛볼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돌아가며 취하도록 마시라고 명했다.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로 삼지 않겠다."(1769년 영조실록 45년 2월 26일) 넉 달 뒤 그가 다시 이리 말한다. '나중에는 졸졸 흐르는 물이 강과 바다가 될 것이다. 다시는 양주하지 말라." 도덕주의자의 부조리함이다.

영조에게 화유옹주라는 딸이 있었다. 2005년 옹주 묘를 발굴하니 부장품이 쏟아졌다. 그중에 분채황지장미문병이 있었다. 노란 유약을 바른 꽃병에 갖가지 그림을 그린 화려한 병이다. 청나라 수입품이다. 중국 도자기를 금하고 청화백자를 금했던 임금님의 따님 무덤에서 바로 그 금지 품목이 나온 것이다. 영조를 이은 정조 때 탄생한 책가도도 마찬가지다. 여염집에서 절대 금지한 중국산, 일본산 수입 도자기가 위풍당당하게 그려져 있다. 금주령도 똑같다. '법이 사대부에게는 행해지지 않고 상민과 천민에게만 행하려고 하니 가슴 아프다.'(1731년 영조실록 7년 6월 10일)

정조 때 실학자 박제가는 이리 말했다. "물건이 없어서 못 쓰는 것을 검소함이라 하지 않는다. 조선은 반드시 검소함 탓에 쇠퇴할 것이다."(박제가, '북학의 내편-시장과 우물') 이 검소와 쇠퇴를 이끈 철학이 바로 교조화된 성리학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위선이었다. 광주 분원리 비석군

조선왕조 마지막 관요였던 경기도 광주 남종면 분원리 가마터에는 비석들이 서 있다. 관요를 관장한 사옹원 도제조, 관요 감독관인 번조관 선덕비들이다. 모두 열아홉 개인데, 예상하다시피, 어느 비석에서도 관요에서 그릇을 직접 만든 사기장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부산요에서 자살한 일본인 도공 이름은 마쓰무라 야헤이타(松村彌平太)다. 지금도 그 이름이 붙은 그릇이 전하고 있다. 조선 관요 도공은 가마 속 그릇 얹는 판에 거칠게 자기 손으로 이름을 적었을 뿐이다. 그 이름은 '손맜소니'다.

▲11월 29일자 A26면 박종인의 땅의 역사 ‘책가도의 비밀’ 편에서 조선 영조가 등극한 해는 1694년이 아니라 1724년이므로 바로잡습니다. 1694년은 영조가 태어난 해입니다. 분원리 가마터 주소도 퇴촌면이 아니라 남종면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