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나갈 군인이 있다. 두 달 뒤 전선에 투입된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소총을 쓸지 모른다면?

원윤종(32)·서영우(26)가 출전하는 한국 봅슬레이 2인승 대표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림픽을 78일 앞둔 현재까지도 봅슬레이팀은 한국 현대차가 제작한 썰매와 라트비아 썰매 전문 제조 기업인 BTC에서 사 온 썰매 중 무엇을 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대표팀 측은 "선수들과 잘 맞고, 기록이 잘 나오는 썰매로 신중하게 고르겠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게 썰매계 의견이다. 내년 2월 평창올림픽 봅슬레이 종목에 출전할 독일·미국 등 타국 대표팀은 이미 지난 3월 썰매 장비 선택을 끝낸 다음 비시즌 기간에 세부 조율을 마쳤다. '올림픽 시즌'을 맞은 이달부터는 본게임을 치르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비 세팅, 장비 적응 훈련 등은 진작 끝냈고, 지금은 경기 감각 향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이 78일 남은 지금까지도 한국 봅슬레이 2인승 팀은 썰매를 정하지 못했다. 원윤종·서영우가 2015년 12월 독일월드컵 대회에서 라트비아 BTC 썰매에 타는 장면.

선택이 늦어지는 이유는 최근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윤종·서영우는 2015~2016시즌 라트비아 BTC 썰매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8차례 월드컵에서 금메달 2개와 동메달 3개를 땄다. BTC 썰매는 35년 경력의 장인이 만든다. 한국뿐 아니라 캐나다·스위스·라트비아 등 썰매 강국들이 선택한 장비이기도 하다. BTC는 대회 현장에 엔지니어를 파견해 팀 성적과 경기력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썰매를 교정해주는 애프터서비스(A/S)도 제공해 호평을 받고 있다.

대표팀의 고민은 2016년 초 현대차 제작 썰매를 기증받으면서 시작됐다. 2016~2017시즌부터 현대차 썰매로 대회를 치르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시즌 개막 전 훈련 중 이 썰매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아직 적응이 덜 됐다'는 판단을 한 대표팀은 다시 라트비아 BTC 썰매를 타고 6차 대회까지 나갔다. 현대차 썰매를 탄 건 7차 월드컵(11위), 세계선수권(21위) 두 번이었다. 이번 시즌에도 현대차 썰매로 재도전 중이지만 월드컵 1차 대회(10일) 10위, 2차 대회(11일)에선 13위를 기록했다. 아직 현대차 썰매로는 10위 안에 든 적이 없다.

일부에선 대표팀이 경기 외적인 고려를 하느라 현대차 썰매를 고수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이 개발해 기증한 썰매를 외면하자니 부담스럽고, BTC를 선택했다가 입상권에서 멀어지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윤종(왼쪽), 서영우.

현대차 썰매가 성적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봅슬레이는 100분의 1초를 놓고 다투는 기록경기인 만큼 썰매 외에도 훈련·준비 상황, 사소한 부상 여부, 정신적 피로감까지 영향을 미친다. 경기 결과만 놓고 특정 썰매가 좋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 선수들은 "현대차 썰매가 성능도 탁월하고, 몸에 더 잘 맞는다"고 입을 모은다. 현대차는 선수들의 체형을 3D로 스캔해 최적 자세로 탈 수 있도록 맞춤 제작을 했고, 풍동 실험,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을 거쳐 공기 저항을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

어느 쪽을 택하든 지금은 빨리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세중 SBS 해설위원은 "지금 '무기'라도 정해놔야 선수들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며 "선수들이 장비에 최대한 적응하려면 빨리 결정을 내리고, 적응 훈련에 몰두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