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기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前 청와대 정책실장

1992년 1월 1일 소련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미국과 양대 축을 형성하며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 제정(帝政)러시아 시절엔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나라, 그런 강력한 나라가 무너졌다. 그것도 전쟁이 아닌 국가 부채로 허무하게 끝났다. 재정이 취약한 상황에서 미국과 무리하게 군비 경쟁을 벌인 것이 패착이었다.

한 나라의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면 위기는 필연적으로 온다. 먼저 외국 자금이 떠나면서 환율이 급등하고 그 여파로 물가가 폭등한다. 금융기관이 마비되고 기업들이 망한다.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그 절차로 위기를 맞았다. 먼저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1991년 5000루블이면 자동차를 살 수 있었지만 1993년에는 초콜릿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생필품은 바닥났고 일자리도 사라졌다. 1994년 화폐개혁으로 루블화 가치를 1000분의 1로 떨어뜨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민 재산만 허공으로 날아갔다. 결국 1998년 디폴트를 선언했다.

국민의 삶은 비참했다. 인구의 40%가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고 거리에는 강도가 들끓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억할지 모르겠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 술집에 러시아 여성이 등장한 것을. 얼마나 살기 힘들면 여기까지 왔을까. 이때 러시아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였다.

국가 부채로 무너진 나라는 러시아만이 아니다. 독일이 1차대전 패배 후 전쟁 배상금 갚으려다가 수렁에 빠진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당시 인플레가 워낙 심해 1000원짜리 빵 하나가 1년 반 만에 10조원이 되었다고 한다. 봉급, 예금 모두 휴지 조각이 되었고 대다수 국민은 무일푼이 되었다. 결국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비극의 길로 갔다. 21세기 들어서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여러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2000년대 초 파산한 아르헨티나는 식량난이 심각해 빈곤층이 개구리와 쥐까지 잡아먹었다고 하고, 최근 파산한 베네수엘라는 굶주림에 지금도 강도와 약탈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리스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힘없는 서민들만 남아서 고통을 겪고 있다. 원래 위기가 오면 서민일수록 고통이 크다. 부유층은 달러나 금 보유를 통해 위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한때 잘살던 나라다. 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 산업혁명에 성공한 독일, 세계 5대 부자 국가 아르헨티나,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 관광 강국 그리스. 모두 정치 지도자 잘못 만난 탓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이들 모두 '설마' 하다가 당했다.

나랏빚이 많은데도 버티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GDP 대비 250% 수준의 국가 부채가 가능한 이유는 금리가 낮은 데다 국채를 국내에서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저축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속할 수는 없다. 향후 경기가 활성화되어 물가가 오르면 금리도 오를 수밖에 없다. 금리 1% 오르면 이자 부담이 세출 예산의 약 10%, 즉 국방비 2배만큼 늘어나야 하니 재정이 감당하기 어렵다. 계속 쏟아지는 국채를 국내에서 소화하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기업들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한 결과 경제가 호전되고 있지만 국가 부채가 결국 발목을 잡게 된다.

선진국들은 국가 부채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사전 대비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2년 우리가 반액 등록금 도입 문제로 시끄러울 때 영국은 등록금을 3배 인상했다. 우리는 선거를 의식해 기초연금 지급액을 계속 올리고 있지만 원조 복지국가인 스웨덴·노르웨이는 이미 폐지했다. 스위스는 공짜로 기본 소득을 보장해주겠다는 법안을 국민이 반대했다. 일본은 소비세를 2배로 인상하고 있다. 미국 역시 해외 분쟁 개입을 최소화하고, 일본 재무장을 허용하는 등 국방비 절감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가 모두 국가 부채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 국가 부채는 지금은 괜찮은 수준이지만 과도한 가계 부채, 일상화되는 재해, 그리고 통일 비용까지 고려하면 여력이 크지 않다. 선진국들이 보여주었듯이 복지에 한번 시동이 걸리면 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국가 부채 위기는 외환 위기 때 겪은 기업 부채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러시아는 원자재 가격이 올라서 살아났지만 우리는 그런 자원도 없기 때문에 대안이 없다. 어떻게 보면 북핵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에 0.1%의 가능성도 차단해야 한다. 지금 국회에서 예산 심의가 한창이다. 복지 확대가 어쩔 수 없다면 증세를 하든지 경제 분야 예산이라도 줄여야 한다. 차제에 가칭 '국가부채상한법'을 제정하는 것도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