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연구의 태두였던 이기백은 1999년에 발표한 '족보와 현대사회'에서 선언한다. 조선시대에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노비의 후손이 사라지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양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한평생 성실 근면하게 산 청소부나 경비원이, 가짜로 족보에 올라간 그 누군가보다 더욱 존경스러운 조상이라고.

평안도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기백의 선조는 성실한 삶을 살아 집안을 일으켜 세웠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비록 삼남의 어떤 집안들 같은 족보는 없지만, 이기백의 조상이 바로 한반도의 진정한 근대인이었다. 이기백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함석헌 역시, 평안도에서 상놈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함경도에서 노비로 태어나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자수성가한 최재형은, 안중근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일본에 살해되었다.

구한말에서 식민지 시기에 눈부신 삶을 살고 존경할 만한 자취를 남긴 사람 중에는, 조선왕조에서 천시받던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의 '상놈들'이 많다. 김건우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 刊)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자학을 중심으로 놓으면 평안도는 조선시대에 뒤떨어진 변경지역이었지만, 주자학의 논리에 반대하는 것이 '진보'라면 이들 지역은 가장 선진적이었다고.

한반도가 분단되자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삼팔따라지'라고 한다. 그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자신의 실력만으로 살아남고자 목숨 걸고 싸웠다. 그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은 남한 사람들을 죽였고 장준하는 남한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선우휘는 어떤가. 그는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우파 기자였던 동시에, 남한 진보진영의 대부인 함석헌·백기완·리영희 등을 후원했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파·좌파 구분을 뛰어넘은 한국판 제3의 길을 걸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대한민국은 조선왕조로부터의 전통이 계승되어 탄생한 나라가 아니다. 그 전통에 반대함으로써 탄생한 폭발력으로 전무후무한 70여 년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안창호가 말한 신민(新民) 즉 새로운 국민들이 만들어낸 신생국가 한국이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경제·정치적 근대화를 이룩한 배경에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근대화를 함께 이룩할 수 있다고 믿은 이들 이북 출신 '상놈들'이 있었다.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잊히고 있지만, 나는 21세기 한국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선인(先人)들이 바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