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한 18년간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여정에서 유례없는 발전을 경험했다. 하지만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같은 정치적 사건은 박정희를 독재자로 낙인찍게 만들었다. 박정희의 역사적 공과는 무엇이고 그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극복할 것인가. 박정희 연구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와 강정인 서강대 교수(정치학)의 대담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재조명한다.

진행=이선민 선임기자

―'박정희 시대'는 5·16쿠데타로 시작됐다. 5·16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영훈(이하 이)=신생국 대한민국이 출범 후 겪은 내부 위기가 해소되고 주도 세력이 전면 교체된 것이다. 제1공화국은 조선왕조 시절 태어나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원로 명망가들이 주도했지만 점차 심각한 위기를 드러냈고, 4·19로 세워진 제2공화국에선 극심한 사회적 분열이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군부가 쿠데타 형식으로 '나라 만들기 2기'를 연 것이다. 1950년대 말을 지나며 세계 체제가 전후(戰後) 복구에서 자유무역으로 큰 변화를 겪었는데 낡은 정치 세력은 이런 변화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강정인(이하 강)=5·16은 대한민국을 주도하던 해외 엘리트 세력이 국내 토착 세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조선왕조에 비유하자면 이승만이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라면 박정희는 나라의 기틀을 다진 태종 이방원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통치 18년은 '10월 유신'을 분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박정희 1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5·16 주도 세력의 유연성·실용성·개방성은 구(舊)정치 세력엔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1950년대 내내 정부의 재정 자립도가 50% 미만이었고 군대는 미국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정치뿐 아니라 외교 갈등도 심각했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 국민 국가로서 내실을 다진 시기가 박정희 1기였다. 수출 주도의 고도성장으로 재정 자립도가 높아졌고 군을 장악했으며 대미·대일 관계도 조정됐다.

=박정희는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5·16 직후의 상황을 "도둑맞은 폐가(廢家)를 인수한 것 같았다"고 했다. 이전 정부들이 공무원 월급을 제대로 못 줬다는 것은 부정부패를 조장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약탈 국가' 단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발전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국가 제도를 정비해 '발전 국가' 단계로 진행했다. 그러나 경제는 물론 정치에서도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다 보니 헌정 체제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차 반(反)민주적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박정희 통치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독재로 치닫는다. 유신 체제를 어떻게 봐야 하나?

=박정희는 정치가라기보다 혁명가였다. 그는 1971년 세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할 때 한국을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고 말겠다는 대계(大計)를 밝힘으로써 사실상 유신을 암시했다. 10월 유신은 그가 근대화 혁명 추진에 제약을 가하는 민주주의를 타파하는 또 한 번의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유신 체제는 정치적 자산이 빈곤했기에 7년 만에 붕괴했다.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훨씬 긍정적일 것이다. 3선 개헌 이후 박정희의 정치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를 가졌다고 비난했는데 자신도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부터 '5·16 민족혁명'을 '민족의 영구혁명'에 비유했다. 장기 역사적으로는 혁명가로 다루어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를 비켜갈 수 있지만 당대의 역사적 지평에서는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중요하다.

―안보와 중화학공업 추진 등 10월 유신의 명분은 박정희 2기에 성취됐는가?

=중국의 마오쩌둥은 1972년 한반도에서도 베트남 같은 유격전을 권유했다. 또 당시는 고도 경제 성장을 막 시작해 후진국에서 유례없는 성과가 나올 때였다. 정권이 교체되면 체제가 재편성되고 경제 전략이 바뀔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이런 위기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박정희 2기의 중화학공업화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100년쯤 지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박정희의 독재와 억압에 수난당한 사람들은 승인하기 어렵다. 인권 탄압 등 유신 체제가 남긴 균열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안보가 중요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그걸 남용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안보 불감증 같은 역효과로 남은 것이 아닌가. 중화학공업화도 당시에는 과잉 투자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효과를 거두었다.

―박정희 시대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한강의 기적'은 누가 이룩한 것인가? '지도자(박정희) 역할론'과 '민중 희생론'이 대립하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자본 축적 과정이 민중 수탈 없이 진행되기는 어렵다. 그것을 어떻게 낭비하지 않고 축적하느냐가 문제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식민지 하나 없는 상황에서 민중 수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것이 경제 발전으로 연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은 세계시장을 무대로 기민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 국가 혁신 체제였다. 국가 어젠다를 적절하게 설정한 박정희 대통령과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주영·이병철 등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기업가가 있었고 우수한 근로·저축·적응 능력을 갖춘 국민이 더해졌다. 박정희 시대에 민중을 착취했다는 시각은 재고돼야 한다. 한국은 노동자·농민을 수탈한 적이 없고 해외시장에서 자본을 축적했다.

―'박정희가 경제는 잘했고 정치는 잘못했다'는 세평(世評)은 옳은가?

=국민에 대한 억압은 필요한 수준에서 억제돼야 하는데 박정희 시대는 상당히 가혹한 억압이 이뤄졌다. 박정희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국은 대단히 암울했다. 게다가 오일 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고 독자 핵개발로 미국과도 갈등을 빚었다. 국민의 지지가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악수(惡手)가 이어지면서 정권 내부의 통합과 조정력이 무너졌다.

=그 시대가 암울했다는 건 정치인 중심의 엘리트주의적 평가 아닌가. 야당 정치인과 반대파엔 억압적 체제였을지 몰라도 국민에겐 고도성장의 과실을 향유하던 시기였다. 지도자가 카리스마를 가지고 국가적 어젠다를 제시하자 다수 국민이 참여했다. 박정희 체제는 시민의 힘으로 무너진 게 아니라 집권층 내부의 모순 폭발과 미국의 압력으로 준비되지 않은 붕괴를 맞았던 것이다.

―'박정희 모델' '박정희 패러다임'은 무엇을 남겼고 지금도 유효한가?

=흔히 그것을 정부 주도형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부와 민간 기업이나 숙련 노동자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세계 경영을 위한 국가 혁신 체제로 자립 경제를 건설한 것이 박정희 모델이었다. 자유와 통상이라는 문명의 큰 원리를 실천한 것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재해석해서 현실에 맞게 재구축한다면 또 한 번의 번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내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민주화와 균형 발전은 갈등 증폭적이고 분열적이다.

='하면 된다'는 신념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이 박정희의 큰 공로였다. 치밀하고 체계적인 리더십이 중요한데 박정희 이후에는 그것이 약화됐다. 하지만 박정희 체제가 남겨놓은 재벌 주도 시스템은 문제다. 기업과 국민이 동반 성장하고 공정 경쟁하도록 합리적으로 제도를 고치고 정치 체제를 더 민주적으로 개선할 때 박정희에 대해서도 좀 더 후한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