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자신의 장례식을 보여주는 듯 검은 외투를 반쯤 걸친 안나 카레니나가 무대 위에서 무너져갔다. 죽음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내려가는 듯한 피아노 연주는 안나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대신했다. 라흐마니노프가 곡을 붙인 '아름다운 이여, 노래하지 마오'가 흐르며 검은 커튼이 내려오자 만석을 이룬 객석에선 '브라보'가 울려 퍼졌다.

1일부터 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는 연기, 연출, 음악, 의상, 무대 등 모든 면에서 조화를 이룬 수작(秀作)이었다. 2014년 취리히 발레단 초연작으로 아시아 초연,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한 '문화 올림픽'에 선정돼 20억원을 지원받은 규모에 걸맞게 외형과 내실 모두 기대를 충족했다.

크리스티안 슈푹의 창의적 안무가 돋보이는 국립발레단의‘안나 카레니나’중 경마장 장면. 손으로 쌍안경 동작을 하는 관중은 말 달리는 영상을 지켜보며 안나의 불륜을 고발하는 연극적 장치로 쓰인다.

라흐마니노프와 루토슬라브스키의 음악은 크리스티안 슈푹(스위스 취리히 발레단 예술감독)의 안무와 적확히 맞아떨어졌다. 한편의 무성 영화를 보듯 연극적 연기 요소가 과감히 들어갔고, 드라마 발레와 모던 발레를 넘나드는 장면 전환으로 장소와 시기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톨스토이의 방대한 원작을 과감히 압축했는데도 주인공 안나(김리회·박슬기·한나래)와 애인 브론스키(이재우·김기완·박종석),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영철·이재우·송정빈)의 치정 얽힌 관계는 물론 안나의 오빠 스티바와 아내 돌리의 불안한 결혼 생활, 브론스키를 흠모하던 돌리의 동생 키티가 레빈과 행복을 택하는 모습 등을 충실히 보여줬다.

막이 오르면 검은색 의상을 입은 가족이 무채색 표정으로 등장해 균일하고 평범한 행복을 보여준다. 안나가 검은색 외투를 벗고 붉은 드레스로 한껏 치장하면서 불행의 씨앗도 함께 자란다. 1막 '벳시의 살롱'에선 브론스키의 강력한 구애에 결국 불륜에 빠져드는 안나의 정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3악장의 풍성하고도 격정적인 선율은 파탄에 이르는 안나의 심경을 대변한다.

치명적 사랑에 빠져드는 안나 카레니나.

2막 초입의 '이탈리아/러시아' 장면은 사랑을 위해 아들까지 버리며 이탈리아행을 택한 안나와 브론스키의 일상이 옅은 수채화로 펼쳐진다. 둘의 아름다운 파드되(2인무)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우아하면서도 순수한 음색과 어우러져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코리안 심포니와 협연한 무대 위 그랜드 피아노(조재혁·김고운)의 연주와 중간중간 등장하는 성악(조윤정·최윤정)의 조화는 신선한 시도였다.

무대는 간결했다. 왼편의 자작나무 세 그루는 19세기 러시아의 허허벌판을 떠올리고, 두 개의 커다란 샹들리에는 화려한 살롱을 암시했다. 독일에서 제작한 110여 벌의 의상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레리나들이 움직일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는 실크 타프타 드레스와 여러 겹의 오간자 페티코트(속치마)가 은근한 매력을 더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는 원작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처럼 좋은 공연을 완성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슈푹의 창의적 안무와 몰입도 높은 연기도 빛났다.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는 '문화 올림픽' 일환으로 내년 2월 10~11일 강릉 올림픽 아트센터 무대에 다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