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만년 조연(助演)이다. 책, 컵, 벽지, 영수증 등의 재료가 될 뿐 주인공 되긴 하늘의 별 따기다. 그림의 바탕을 제공할 뿐 보조 역할인 건 미술에서도 마찬가지. 디지털 기기 발전하고 미디어 아트 성행하면서는 더더욱 찬밥이 됐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내년 3월 4일까지 열리는 '종이 조형전―종이가 형태가 될 때'는 종이가 지닌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이색 전시다. 김호득·송번수·임옥상 등 중견과 신예 26명 작가가 종이를 화두 삼은 작품 39점을 선보인다. 종이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는지 새삼 놀라게 되는 전시다. 한지, 양지, 골판지, 신문지 등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오리고 붙여 만든 부조부터 입체 조형까지 어른·아이 모두 눈을 빛낼 작품들이다.

이주연의‘Entropical’. 높이 1m70으로 미술관 벽 한 면을 가득 채울만큼 커다란‘종이 폭포’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철제 구조물에 한지 100장을 빨래처럼 촘촘히 걸어놓은 김호득의 '겹과 사이'는 바람과 햇빛을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연못에 반사돼 일렁이는 햇살이 하얀 종이에 비쳐 '드로잉'을 하고,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얇은 한지를 출렁이게 한다. 최병소의 '광적인' 신문지 작업도 재미있다. 시끄러운 뉴스를 모조리 지워버릴 요량으로 신문에 연필과 볼펜을 긋고 또 그어 석탄의 표면인 양 온통 새카만 종이로 만들었다.

이주연은 종이 폭포를 만들었다. 조그마한 '페이퍼맨'의 입에서 깃털 형상의 종잇조각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속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던 걸까. 나무판 위에 여러 겹 한지를 쌓아올려 가시를 음각화한 부조 작품 송번수의 '가시'와 '십계명'은 삶의 고통을 은유하듯 가슴을 아프게 찔러온다. 최용준 뮤지엄 산 학예실장은 "접거나 오리는 것 외에 종이가 지닌 다양한 소통 방식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움 산은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이름난 미국 작가 제임스 터렐의 특별관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033)730-9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