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호흡기를 끼고 목숨만 유지한다고 사는 게 아니죠. 불필요한 치료 받느라 가족들에게 부담될 생각은 없습니다."

23일 서울 중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 정득성(78)씨는 '본인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될 때 심폐소생, 혈액투석, 인공호흡기, 항암제 투여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이름을 정자로 꼭꼭 눌러쓰며 이렇게 말했다. 상담사 노순희씨가 "중요한 서류라 선생님께서 서명할 곳이 많다"고 하자, 정씨는 서류 두 군데에 자필 서명을 했다. 충분한 설명을 들었고,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사전의향서 작성에 30여 분이 걸렸다.

23일 서울 중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에서 정득성씨가‘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될 때 심폐소생, 혈액투석, 인공호흡기, 항암제 투여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있다.

[존엄사 가능해져…안락사와 다른 점은 무엇?]

정씨는 "전립선 비대증을 앓고 있지만 그 외에 아픈 곳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를 나중 일을 대비해 이날 사전의향서를 써둔 것이다. 1남 2녀를 둔 그는 "오래전부터 자녀들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자녀들에게 내 뜻을 전했고, 아내도 곧 사전의향서를 쓸 예정"이라고 했다.

환자 뜻에 따라 연명(延命)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 시범사업이 시행된 첫날인 이날, 시범사업 기관으로 선정된 단체들은 정씨처럼 사전의향서를 작성하거나 관련 상담을 받으려는 이들로 붐볐다. 실천모임 사무실에는 쉴 새 없이 전화기가 울렸고, 사전의향서를 쓰는 상담자도 줄지어 찾아왔다. 시범사업 기관인 한국웰다잉협회 최영숙 회장은 "오전부터 문의 전화가 쏟아져 전화기가 불통이 됐다"며 "우리 기관을 통해서만 수십 명이 사전의향서를 썼다"고 했다. 사전의향서를 쓰지 못한 채 임종을 앞둔 환자가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연명의료계획서' 시범사업도 이날부터 시행됐다.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이들은 주로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상담사 노순희씨는 "치료비 등 경제적인 부담도 있지만, 그보다 자녀에게 '부모 생명을 계속 이어가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분들이 더 많다. 곤란한 결정을 미리 본인 손으로 끝내 두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이도 적지 않다. 이날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이모(여·60)씨는 "자식은 '나중에 돌봐드릴 수 있다'며 오히려 서운해했다"면서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나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범사업 기관인 각당복지재단의 오혜련 상임이사는 "많은 분이 사전의향서에 관심을 보였지만, 여전히 자녀 눈치를 본다거나 사전의향서 제도가 악용될 소지를 걱정하는 경우가 있다"며 "전문성 있는 상담 인력을 양성해 제도 취지를 잘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