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연회 음식은 역시나 청어가 우선일까?'라고 지난주에 썼었다. 북유럽의 청어 애호는 유별난 데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쪽 나라에서 나온 소설이나 에세이를 펼치면 여기서도 청어, 저기서도 청어라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쪽의 청어는 주로 초절임이거나 염장 청어지만, 한국 사람인 내게 익숙한 청어란 청어구이, 청어알젓, 과메기 정도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니신소바. 청어소바다. 청어소바는 일본 음식이고, 일본말로 청어는 '니신'이기 때문에.

열렬히 청어소바를 좋아한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청어소바가 생각날 때는 이왕이면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청어소바를 먹자고 생각한다. 색이 짙지 않은 순면에 가까운 메밀 면에 정성 들여 구운 청어, 쪽파가 됐든 미역이 됐든 가지런히 얹은 초록색 물체만이 있는 그런 청어소바를. 향이 은은하고, 국물에는 청어 기름이 몇 방울 비칠까 말까. 이런 소바는 일단 눈으로 먹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코로 마시고, 그다음 입으로 먹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청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청어는 조금 희한한 생선이라 평소에는 자주 먹지 않지만, 이따금 못 견딜 정도로 당겨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먹고 나서 크게 만족하거나 감동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고. 하루키의 이런저런 글들을 묵어 엮은 '잡문집'에서다.

이번 기회에 청어 관련 어휘도 탐구할 수 있었다. '청어처럼 죽었다'는 '완전히 숨통이 끊어졌다'고, 대서양은 '청어 못(herring pond)'으로도 불린다고. 가장 흥미로운 것은 '빨간 청어'다. 일차적으로는 훈제 청어(청어는 훈제하면 빨개진다고)를, 비유적으로는 '주제와 관계없는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도망자가 추적해오는 경찰견을 따돌리기 위해 '빨간 청어'를 투척, 개들의 후각을 교란시킨 데서 유래했다. 도망자씩이나 돼서 어떻게 훈제 청어를 상비하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써먹을 수 있었는지가 나로서는 의문이지만. 빨간 청어라. 어감도 좋고, 의미도 좋다.

내가 서점을 연다면 상호로 쓰고 싶을 만큼이나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 끊임없이 '나'로부터 이탈하려는 모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루키는 자신에게 에세이가 '맥주 회사가 만든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나한테는 하루키의 글이 청어소바 같다.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길 때가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