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전날이었어요. 꿈을 꿨는데, 예전에 살았던 서울 광화문 집에서 누가 하얗고 길쭉한 무를 광주리 그득 담아 제게 줬죠. 품에 안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또 다른 누군가가 화사한 꽃다발을 줬어요. 아무래도 태몽 같다 싶어 두 아들 내외 옆구리를 쿡쿡 찔렀죠. '무슨 소식 없니?' 하고요. 근데 제게 이런 복(福)이 올 줄이야!"

올해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재숙(76) 서울대 명예교수는 "운동을 하고 나오다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었다. 활동을 많이 하는 국악인들도 많은데 내가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겸손해했다. "38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5남매 중 둘째 딸인 제가 국악 하는 걸 못마땅해하셨죠. 국악을 했기에 이렇게 좋은 상도 받는다는 걸 아버지가 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재숙 명인이 50년 넘게 동고동락한 가야금을 품에 안았다. 그녀에게 가야금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운명”이자 “나만의 길을 개척하게 해준 일등공신”이었다.

이재숙은 평생 '처음'이란 단어를 몰고 다니며 독보적 길을 개척한 국악인이다. 서울대 국악과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으로 국악인 최초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64년 10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가야금 독주회를 열어 지금과 같은 국악 독주회의 전형을 세웠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가야금 산조 다섯 바탕을 최초로 녹음하고 오선보(五線譜)로 악보화해 1971년 일명 '빨간책'이라 불린 '가야금 산조'를 출판한 것도 그다.

어린 시절엔 성악가를 꿈꿨다. 대한석탄공사 영월광업소장이던 부친을 따라 강원 영월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그는 1951년 군에서 주최한 6·25 휴전 반대 콩쿠르에 나가 부상으로 밥솥을 탈 만큼 노래를 좋아했다. 서울여상에 입학해 황임춘 선생에게서 성악과 아코디언을 배웠다. "지금도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는 다 부를 수 있다"고 했다.

1959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지망했지만 1지망에서 낙방하고 2지망으로 당시 처음 생긴 국악과에 합격했다. 초창기 국악과 학생들은 세 부류였다. 국악에 적응하지 못해 음악을 그만두거나 서양 음악으로 돌아가거나 국악의 길을 새롭게 걸어가거나. 이재숙은 그중 마지막 길을 택했다. "중도에 그만두는 건 내 성정과 안 맞아서." 당시 서울대 강사로 강의를 갓 시작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그의 첫 스승이었다.

['방일영국악상' 이재숙 명인은 어떤 인물?]

방학 때에도 황병기 선생을 매주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국악을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시킨 만당 이혜구 선생을 비롯해 가야금 대가인 김병호·성금련·김윤덕 선생도 스승으로 모시며 연습에 매진했다.

당시 우리 음악은 철저하게 '구전심수(口傳心授)'를 따랐다.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물여섯에 서울대 전임강사가 된 그는 가야금 여섯 바탕의 1세대 명인들을 직접 찾아가 배우고, 그들의 산조 연주를 녹음하고 악보로 써서 기록했다. 명인이 타계하면 제자를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이 어떤 바탕을 익히고 들어오든 전부 가르칠 수 있게 나부터 모든 유파를 배우고 섭렵했다. 악보가 전부일 수는 없지만 오리지널 산조의 원형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작업이었다"고 했다.

1971년 산조 다섯 바탕을 펴낸 후에도 이재숙은 30여년간 증보 작업에 매달렸다. 1994년부터 6년간 한 유파씩 가야금 산조 여섯 바탕을 완주하는 독주회도 열었다. 2008년 펴낸 '가야금 산조 여섯 바탕 전집'은 그 결실이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김죽파·최옥삼·성금련·강태홍·김병호·정남희 등 인간문화재들의 녹음과 악보가 고스란히 담겼다.

당시만 해도 국악은 '없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푸대접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독주회를 열 때마다 창작곡까지 포함해 프로그램을 짰고, 국악기로 찬송가를 반주하기도 했다. "음악은 고여 있으면 안 돼요. 고려청자 같은 고유문화가 있어도 플라스틱 같은 새로운 음악이 나와야 살아남을 수 있죠."

이재숙은 자기 관리에 혹독한 음악인이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 공연한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여서 뜨거운 걸 잘 만지지만 연주를 앞두곤 손을 다치면 안 되니까 칼도 안 만진다"고 했다. "내 역할은 정통 국악인과 이 시대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되는 것. 숙명처럼 한 길을 걸어왔고 귀한 상으로 인정도 받았으니 주시는 상금 또한 저만을 위해 쓰지는 않겠습니다."

☞'국악계 노벨상' 방일영국악상은

1994년 출범한 방일영국악상은 방일영·방우영 선생이 설립한 방일영문화재단이 국악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명인 명창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이다.

첫 회 수상자인 만정 김소희 선생을 비롯해 이혜구(2회) 박동진(3회) 김천흥(4회) 성경린(5회) 오복녀(6회) 정광수(7회) 정경태(8회) 이은관(9회) 황병기(10회) 묵계월(11회) 이생강(12회) 이은주(13회) 오정숙(14회) 정철호(15회) 이보형(16회) 박송희(17회) 정재국(18회) 성우향(19회) 안숙선(20회) 이춘희(21회) 김영재(22회)에 이어 지난해 김덕수 사물놀이 명인까지 최고의 국악계 스타들이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