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겨울. 농구가 전국구 인기 스포츠로 이름을 날릴 때다. '컴퓨터 가드' 이상민(45)이 이끌던 연세대는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최종전 상대로 맞수 고려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엔 '거물급' 신인 한 명이 있었다. 나중에 '매직 히포'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 현주엽(42)이었다.

엎치락뒤치락했던 경기는 서장훈(연세대)의 버저비터가 터지면서 77대75 연세대의 2점차 승리로 끝났다. 연세대는 13전 전승으로 리그 1위, 고려대는 2위(11승2패)가 됐다. 대학 두 팀이 기아차, 현대전자, 삼성전자 등 실업팀을 모두 제치고 1-2위가 된 건 농구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상민과 현주엽은 이후로도 수많은 '오빠 부대'를 이끌고 다녔다.

졸업 후 프로에 온 두 선수는 한국 농구 '레전드'가 됐다. 이상민은 수비를 한 번에 깨는 정확한 패스, 날카로운 슈팅, 게임을 읽는 두뇌까지 포인트가드가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췄다. 준수한 외모까지 더해 수많은 여성팬들이 따라다녔다. 현주엽은 힘의 대명사였다. 195㎝ 키로 2m 넘는 외국 선수들과 붙어도 밀리지 않았다. 상대를 제압하는 몸싸움과 덩크슛, 유연한 패스까지 갖춘 만능 포워드였다. 이상민과는 반대되는 매력으로 팬들을 몰고 다녔다.

[이상민 "움직임 없는 플레이 아쉬웠다"]

['매직 히포' LG 현주엽 감독, 삼성 잡고 2연승]

프로 무대의 승자는 이상민이었다. 이상민이 챔피언전 3회 우승으로 '현대 왕조'를 건설했다면, 현주엽은 프로생활 내내 무릎 부상에 시달렸고,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무관의 제왕'이란 별명은 그래서 생겼다. 둘이 마지막으로 붙은 건 지난 2009년 3월 6강 플레이오프전이었다. 당시 이상민의 서울 삼성이 현주엽의 창원 LG를 3승1패로 꺾고 4강전에 올랐다. 그래서였을까. 현주엽은 지난 4월 LG 감독에 취임하며 "이상민 감독의 삼성을 꼭 이겨보고 싶다"고 했다.

17일 두 사람이 8년 7개월, 3124일 만에 다시 붙었다. 이번엔 감독 신분이었다. 경기 전부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상민 감독은 "(현주엽 감독을) 만나긴 했는데 말은 거의 안 했다. 오늘 경기 잘하라는 덕담도 서로 없었다"고 했다. 현주엽 감독도 "옛날 이야기만 좀 했다"며 말을 아꼈다. 둘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현주엽 감독은 첫 경기에서 '소원'을 이뤘다. 17일 잠실에서 열린 두 팀의 2017~18 프로농구 시즌 첫 대결에서 LG가 삼성을 87대74로 꺾고, 개막 2연승을 달렸다. 현주엽의 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32번을 단 김종규(26·LG)가 마치 예전 현주엽처럼 골밑에서 외국인 선수들과 싸워가며 궂은일을 해줬다. 그는 4쿼터엔 2개의 덩크슛을 터뜨려 승기를 가져왔다. 주전 가드 김시래(28)가 18득점 7어시스트로 활약했고, NBA 출신인 조쉬 파월(34)도 연달아 중거리슛을 터뜨리며 18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전반 41―42로 뒤졌던 LG는 후반 패스 플레이가 살아나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LG는 이날 팀 어시스트 23개를 기록해 어시스트의 명수인 이상민의 삼성(16개)을 압도했다. 현주엽 감독은 "선수들의 집중력이 좋았고, 주전·벤치를 가리지 않고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고 평가했다. 초보 감독 현주엽은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

LG는 19일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의 슈팅가드였던 문경은 감독이 이끄는 서울SK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