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여론독자부장

긴 연휴에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효과까지 겹친 이번 추석 귀성은 교통 체증으로 꽤 힘들었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틈에 끼어 느릿느릿 나아가다가 지난해 이맘때 읽은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라는 일본 소설을 떠올렸다. 쏟아지는 비로 버스마저 끊긴 저녁, 폭우를 뚫고 악착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소설 주인공 사카키는 명절을 맞아 교통 체증을 무릅쓰고 고향 가는 길을 나선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사카키는 자신에게 묻는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혼남인 사카키는 엄마와 사는 아들과 다음날 아침 만나기로 약속한 터였다. 회사가 있는 간척지는 집이 있는 육지와 멀기 때문에 오늘 반드시 귀가해야 한다. 그래야 늦지 않게 아들을 만나 스타워즈 팝업북을 선물하고 아들의 웃는 얼굴도 볼 수 있다. 그는 가족이 그리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각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눈다. 그렇지만 사상 최대 인파가 움직였다는 이번 추석에도 고향에 가지 못한 젊은이가 있고,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다 홀로 명절을 보낸 부모가 있다.

혼자 밥 먹는 혼밥족(族), 혼자 술 마시는 혼술족이 유행하더니 마침내 '홀로 추석을 지낸다'는 뜻의 혼추족까지 생겼다. 식당엔 혼밥족을 위해 칸막이를 친 1인용 식탁이 등장하고, 마트에 가면 혼술족을 위한 주류 코너가 눈길을 끈다. 이런 세태를 보면 혼자 사는 게 마치 쿨한 유행인 듯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무리를 지어 함께 밥 먹으며 웃고 울고 떠들어야 살맛 나게 돼 있다. 공광규 시인은 혼밥 하는 삶의 서글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시 '얼굴 반찬')

추석 당일인 4일 오전 서울 경부고속도로 잠원IC 인근에서 바라본 고속도로 모습. 이른 귀경 차량들과 귀성 및 휴가 차량들이 지나고 있다.

명절인데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혼추족이 되어 혼밥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 문제를 꼽는다. 변변한 직업이 없어 결혼의 기쁨도, 아이 낳아 기르는 재미도 누리지 못하니 서럽고 괴롭다. 그런 처지를 걱정하는 부모의 말이 부담스러워 고향을 외면한다. 한 구직 사이트가 올해 추석을 앞두고 20대 1190명을 대상으로 물었더니 10명 중 6~7명이 '혼자 추석을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이란 응답이 27.2%로 가장 많았고, 친척의 잔소리를 피하고 싶어서(23.4%), 취업 준비 및 시험 준비 때문에(17.3%) 등의 순이었다. 생계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로 바쁜 삶이 고향으로 향하는 청년의 발길을 잡는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제·추기경으로 지내던 시절 실업자를 많이 만났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자리가 가족을 이어주는 끈임을 강조하면서 "내가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언론인과의 대담집인 '교황 프란치스코'에서 교황은 노동을 부모 자식 간 불화 해결 방법으로 꼽기도 했다. 반면 실업에 따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섣불리 복지에 의존하는 것은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기부의 문화가 아닌 노동의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며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 놓은 일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게 되자 근무 일자나 근무 시간을 줄이지만 국가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했다.

내일이면 긴 연휴를 끝내고 일터로 복귀한다. 휴식이 꿀맛인 것은 돌아갈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내년 추석엔 더 많은 청년이 떳떳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서 가족과 명절을 보낼 수 있을까.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