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가 담긴 링거액을 끼고 바이올린 연주를 듣던 암 환자들은 잠시 투병을 잊고 음악에 빠졌다.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현악 4중주의 선율로 퍼질 때는 사뭇 상념에 빠진 환자도 보였다. 지난 22일 서울 고려대병원 암 병동 라운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소속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공연 풍경이다. 공연은 노사연의 '만남' 현악곡과 암 환자들의 허밍으로 마무리됐다.

이 공연을 기획한 이는 비영리법인 '이노비(EnoB)' 강태욱(46) 대표다. 이노비는 주로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에게 음악 공연을 무료로 펼치는 단체다. 11년 전 뉴욕에서 시작한 병원 공연은 이제 국내외에서 400회를 넘겼다. 이노비는 '이노베이티브 브리지'의 약자로, 변화를 이끌어 내는 혁신의 다리가 되자는 의미다.

22일 서울 고려대병원 암 병동 라운지에서 ‘이노비’가 공연을 열었다. 이노비 대표 강태욱(맨 오른쪽)씨가 암 환자들과 함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공공정책대학원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던 강 대표는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 저소득층 가정 자녀 상당수가 음악 공연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얘기를 2006년 들었다. 클래식 애호가인 강 대표는 줄리아드 음대 출신 전문 음악인들을 모아 저소득층 이민 가정 자녀들을 위한 공연을 열었다. 이민자 자녀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음악 봉사 단체 이노비를 설립했다. 주로 뉴욕 일대 병원과 복지시설을 돌며 공연을 하다가 2012년부터는 서울에 이노비 지부를 차리고 국내 공연을 시작했다.

강 대표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면역력이 떨어져 음악회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한 힐링 공연"이라며 "정식 연주회를 병원에 옮겨 놓기 위해 전문 음악인이 연주복을 입고 공연을 한다"고 말했다. 전국 병원에서 공연 요청이 많지만, 연주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한 해 130여 회로 제한하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꼴이다.

이노비에는 음악 감독이 30명 있다. 이들이 병원과 대상 환자들을 감안해 곡목을 구성하고 연주자를 선정한다. 연주자는 300여 명이 활동한다. 연주는 재능 기부로 이뤄지기 때문에 함수연(고려대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이노비 이사 등 40여 명이 내는 후원금만으로도 연중 공연이 돌아간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은 일 년에 4차례 이노비 초청 공연을 한다. 그곳 환자들에게는 생애 마지막 연주회 감상이다. 드레스 차림으로 공연을 보는 여성 환자도 있었다. 자녀가 모두 와서 말기 암 환자인 부모 손을 잡고 연주를 감상하는 가족 나들이 시간이기도 하다. 강 대표는 "한 명의 암 환자를 위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환자는 편안히 연주를 감상하고 3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도, 고위험 임신부들이 태아 모니터링 장치를 달고 입원해 있는 분만실에서도 연주가 이뤄졌다. 음악을 듣던 임신부의 태아 심장박동이 고요해졌다고 한다. 강 대표는 "음악 봉사는 전문성, 진정성, 지속성의 3박자를 갖춰야 한다"며 "환자와 가족들에게 음악을 선사하는 것도 복지이자 치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