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추석 전날 밤 용산역 광장의 귀성객들이 경찰 통제에 따라 줄 맞춰 앉아있다(조선일보 1970년 9월 15일 자). 아래는 1969년 추석 때 서울역에서 장대를 휘두르며 인파를 정리하는 경찰들.

1969년 추석 이틀 전이던 9월 24일 밤 수만명의 귀성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서울역광장에서 비상 근무하던 경찰들 손에는 낯선 장비가 들려 있었다. 길이 5m쯤 되는 대나무 장대였다. 인파를 물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은 "앉으라"고 고함쳐도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장대를 휘둘러 강제로 앉혔다. 군중이 일어서 있으면 질서를 지키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든 앉혀 놓으려 했다. 어물어물하고 경찰 말을 안 듣다간 장대에 머리통을 맞는 수가 있었다. 경찰은 필요하면 경찰봉도 휘둘렀다. 서울역에서 30대 귀성객이 경찰봉에 이마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69년 9월 25일자). 귀성 현장이 아니라 시위 진압 현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서울역에서 펼쳐졌다.

경찰이 귀성객들을 그토록 거칠게 다룬 건 1960년 서울역 참사의 악몽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해 설날을 이틀 앞둔 1월 26일 밤 귀성객들이 플랫폼을 향해 한꺼번에 몰려가다가 계단에서 쓰러지면서 31명이 사망했다. 3등 열차는 지정석이 없던 시절이라 자리를 잡기 위해 그 많은 인파가 앞다퉈 달려간 게 화근이었다.

그 뒤로 명절 때마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경찰엔 초비상이 걸렸다. 1968년 추석 전날인 10월 5일 서울역엔 20만명이 운집했다. 새치기 시비 끝에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자 경찰은 통제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몽둥이와 대나무 빗자루로 때렸다. 일부 승객은 "차도 못 타고 매만 맞았다"고 경찰을 비난했다(조선일보 1968년 10월 6일자). 대나무 빗자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장비가 5m짜리 장대였다. 이 장대는 1970년대 명절 귀성 인파가 몰린 곳마다 나타나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귀성 전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관할하는 강남경찰서는 1977년 추석 때 장대 70개를 준비했으나 모두 부러져 없어졌고, 1978년 설에 만든 50개도 명절 치르면서 모조리 부러졌다.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 해도 장대를 휘두르는 건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벼슬자리에 앉으면 백성에게 힘을 휘둘렀던 전근대적 '관존민비' 의식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난무하는 장대 앞에서 시민들도 고개만 숙이고 있지는 않았다. 1979년 추석 때는 서울역 공안원들이 장대로 사람을 마구 후려치자 상당수 귀성객이 들고일어나 공안원들과 다툼을 벌였다. 그래도 경찰 간부는 "귀성객이 갈수록 늘어나니 안전을 위해서 장대를 안 쓸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언론은 "경관들이 장대를 들고 휘저어야 그나마 질서라도 유지되는 판이니 국민소득 1000달러의 국민치고는 아직 철이 덜 든 것 아니냐"는 반성도 했다. 명절이면 장대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기차를 타야 했던 세월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경찰이 귀성객에게 장대를 휘두르는 문제는 1980년 신문에도 언급됐다.

이제 공권력이 질서 유지를 이유로 무고한 시민에게 몽둥이질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람 키보다 큰 장대가 난무하는 곳은 아직도 있다. 격렬한 가두 시위 현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장대를 휘두르는 쪽은 경찰이 아니라 시위대다. '장대 전쟁' 역사의 반전이라고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