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시장에서 옷 수선을 하는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은 구청장이 5번 바뀌는 동안 8000건의 민원을 신청했다. 2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 제기해야 가능한 분량이다. '시장 바닥에 가게 입간판이 나와 있어서 아이들이 다칠까 걱정'이라거나 '대통령 당선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당선사례 포스터는 떼는 게 좋겠다'처럼 시시콜콜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무소신과 복지부동의 구청 민원실 직원들은 이 할머니를 '도깨비 할매'라고 부르면서 피하느라 바쁘다.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는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전근 오면서 민원실에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돈다.

21일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는 할머니와 9급 공무원이라는 이색 조합을 통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의 외양을 띠고 있다. 시장 바닥을 헤집고 다니며 민원 거리를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행동파 할머니'와 사무실 책상을 말끔하게 정리한 뒤에야 업무를 보는 '원칙파 공무원'의 갈등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나옥분 할머니가 민원 서류와 증거 사진을 한가득 들고 와도, 공무원 박민재는 '번호표를 뽑지 않았기 때문에 접수를 받아줄 수 없다'고 꼬장꼬장하게 버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구청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오른쪽)는 ‘나옥분’ 할머니(나문희)와 티격태격 다투다가 조금씩 정이 들고 만다.

사사건건 부딪치던 이들의 속사연이 드러나면서 영화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고교생 동생과 단둘이 사는 박민재는 알고 보니 부모님 생전에는 미국에서 공부했던 '해외 유학파'였다. 나옥분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민 간 남동생과 대화하고 싶어서 동네 학원에서 틈틈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구청 민원실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풀기 위해 박씨는 나옥분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합의한다.

영화는 'YMCA 야구단'과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 조작단'의 김현석 감독이 연출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같은 유쾌한 멜로물의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데뷔한 감독의 경력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난다. 구청 동료 여직원 '아영'(정연주)이 자신의 속마음도 몰라주는 주인공을 향해 느닷없이 "벌 받으실 거예요"라고 핀잔을 주는 장면이 그렇다. 핵가족을 넘어서 '1인 가구'로 접어드는 세태에 발맞춰, 영화 속 인물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사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정(情)을 나눈다. 그런 의미에서는 '21세기의 추석에 어울리는 가족 영화'다.

나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고자 결심한 이유가 드러나는 영화 후반부으로 향하면서 일본군 강제 동원 위안부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된다.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코미디에 가까웠던 영화도 조금씩 딱딱하고 전형적인 사회물로 바뀐다. 사실상 악인이 존재하지 않고 선한 인물만 가득하다는 점에서는 동화적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약점에도 강제 동원 위안부 문제를 다루던 한국 영화의 전형적 공식에서 탈피하고자 애썼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사람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동네 상인들이 나옥분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꼭 껴안을 때, 어느덧 관객들도 상인들의 마음이 된다.

영화 '수상한 그녀'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코믹 연기의 진수를 선보였던 나문희는 이번에도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활어(活魚) 같은 연기를 보여준다. 나문희가 동료 할머니 '정심' 역의 손숙과 호흡을 맞출 때면, 둘이 아무런 말 없이 병실에 앉아 있기만 해도 관객들의 눈물샘이 터진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문희가 연기한 나옥분 할머니는 세상 그 어떤 젊은이보다 아름다운 영어를 구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