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Batman)이 아니라, 그냥 맨(Man)이다. 불편한 자세로 책상에서 곯아떨어진 그의 등 뒤로 부엉이와 박쥐 떼가 날아오른다. 바닥엔 웬 스라소니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고양잇과 동물답게 어떤 괴물의 낌새를 눈치챈 듯 놀란 눈을 치켜뜬다. 미국 코믹스를 연상시키는 이 미스터리한 풍경 한 귀퉁이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 ~1828)의 에칭. 당시의 미신과 악습에 대한 풍자가 담긴 작품이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낮의 이마가 바닥에 닿자,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나쁜 생각이 스멀스멀 깨어나는 장면. 과학과 계몽의 시대였음에도 혁명과 전쟁의 광기에서 고야는 인간의 추악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아마 남자는 종이에 뭔가를 쓰다가 잠든 것 같다. 지혜의 여신과 함께 다닌다는 부엉이, 그중 한 마리가 펜을 쥐고 남자에게 건네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숙면이 아닌 쪽잠이라는 점에서, 깨어 있으려는 의지가 남자의 상반신에 잔존한다는 점에서 이 잠은 희망적이다. 잠에서 깨어나 무엇을 쓰게 될 것인가. 괴물은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성(理性)이 아니라 이성(異性)이 잠들어도 괴물은 눈뜬다. 자나깨나 인간은 불안한 존재. '잠에 취한 미술사'(백종옥 지음·미술문화 刊) 127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