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록 논설위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조 2항이 법조문에서 빠져나와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은 영화 '변호인'부터일 것이다. 영화관에서만 1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송강호가, 실은 노무현이 절규하는 이 모습을 봤다. 그걸 본 문재인은 손수건을 꺼내 들었을 것이고,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떠난 이후 가슴속에 새기고 또 되새겼을 것이다.

이 '국민주권'은 문 정권의 정치전략 문서 1호라 할 수 있는 국정자문위의 '100대 과제' 보고서의 첫 자리를 차지했다. 보고서엔 '국민'을 새로 정의하는 눈에 띄는 구절이 들어갔다. "주권자 국민은 '나'를 대표하지 못했던 기존 정치의 한계를 넘어 국민 개개인이 권력의 생성과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국민의 출현"이라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회견에서 "진정한 국민주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틀 전 8·15 경축사에서도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사흘 후 국민보고대회라는 행사에서는 급기야 '직접민주주의'로까지 갔다. "국민은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며 "직접 촛불을 들어 정치적 표시를 하고 댓글을 통해 직접 제안하는 등 직접민주주의를 국민이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직접민주주의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취임 100일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출입기자들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청와대 내부서도 "대통령 메시지 과잉"이라는데…]

문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주권 시대 개막'이라는 것은 그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천명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문재인 정치 제1의 작동 원리라 할 만하다. 국민, 정확하게는 인민(人民·People)의 이름으로 국가와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통째로 바꾸겠다는 거다. 그 대척점엔 계파정치 국회, 제왕적 대법원장이 지배하는 법원, 육사 중심 군과 미국 중심 외교 라인이 있다. 재벌과 관료 중심 경제는 물론이다. 이것이 문 대통령 생각이다.

문재인식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뒷배는 역시 지지율이다. 그제 나온 리얼미터 주중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전주에 비해 2%P 넘게 올랐다. 지난 한 주 살충제 계란 파동이 정권을 압박했다. '비정규직 제로' 선언은 여러 곳에서 부작용을 분출하고 있다. 전교조 교사들이 교총 교사들과 손잡고 기간제 교사 정규직 채용을 반대하는 희한한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헬리콥터 복지', 탈원전에 대해선 전문가 70~80%가 반대다. 그런데도 지지율이 반등한다.

기자는 문 대통령 지지율이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주변 많은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얻은 결과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다. '문제가 많다는 것 안다, 불안한 대목도 많다, 그러나 최소한 1~2년은 이렇게 가야 한다.' 대체로 이런 요지다. 지금 이 나라엔 중산층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자산시장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다. 미국 언론인 존 주디스가 전 세계를 강타한 포퓰리즘의 배후에 '급진적 중산층'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만의 사정이 아닌 듯하다. 문 정권은 이런 저항적·전복적 에너지를 권력 기반으로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국민은 그 길로 가야 한다고 박수를 친다.

문 대통령은 지금 '국민'을 앞세운 '제왕적 대통령'이다. 균형 예산이라는 수십 년 국가 재정 규율을 깨려 하고 있고, 기업에 요금 내리라는 압박도 공개적으로 해버린다. 인사도 파격의 연속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공개 비판도 서슴없다. 앞으로 더 충격적인 것들도 나올 것이다. 야당들은 견제할 능력과 명분을 재생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지지율 독재라 해도 손색이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 실험적 국정 운영이 성공하길 바란다. 문제는 그것이 잘못됐을 경우 과연 수습이 가능하겠느냐다. 몇 년 뒤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