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팔렸다고 좋은 시집일 수는 없겠지만, 좋은 시집이 많이 팔리는 건 즐거운 일. 젊은 시인 박준(34)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2015)는 이달 중순까지 8만7000여 부가 나갔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드문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경이로운 숫자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적도 있다. 최근 시인은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난다刊)을 펴냈다. 울고 싶을 때 늘 함께 울어주는 '울보 시인'이랄까.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 더 내밀한 책 고백. 나의 사적인 서가, 이번 회는 시인 박준 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1.'울보 시인'을 울게 만든 시집이 있다면.

선후배 시인들의 시집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자주 웁니다. 좋은 작품이 반가워서 울기도 하고, 나는 왜 이런 시를 못 썼을까 하는 자책으로 울기도 합니다. 이때의 울음은 실제적 울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故 신기섭 시인(1979~2005)의 유고 시집 '분홍색 흐느낌'만큼은 매번 읽을 때마다 정말 마음과 몸을 다해 웁니다. 신기섭 시인은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아였습니다. 그리고 요절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배경만으로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밥솥의 보온 불빛은 반딧불이라도 날개 다친 반딧불이 같아 오래 묵은 밥 냄새를 품은 아주 작은 빛"('치마폭 자취방') 같은 순한 문장에서부터 울먹거리다가 "엄마, 언제부턴가 모든 엄마는 비명이었다"('가족사진') 같은 짙은 문장에 이르면 매번 눈물이 터집니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엄마'라는 말을 비명처럼 뱉었을까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 아득합니다.

2. 반대로 당신을 웃게 만든 시집이 있다면.

흔히 서사는 소설의 영역으로 여기지만 저는 짧은 형태의 시로도 유장한 서사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나 신동엽 시인의 '종로5가'는 하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더없이 아름다운 시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시집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시편들을 좋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집이 이시영 시인의 '은빛 호각'입니다. "시응이 가갸 요지음 놀고 있는갑습디다요…/어찌 그까 이…/…/…//어느 초라한 무덤가에 빈 소주병 하나/그리고 빗물에 방금 씻긴 듯한 깨끗한 종이컵 하나"라고 시인은 쓰고 '골짜기'라는 제목을 붙여두었습니다. 이 짧은 시 안에 실업과 가난, 삶과 죽음, 누대(累代)에 거친 애정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들을 보면서 웃습니다.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웃습니다.

3. 죄책감을 느끼지만,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읽는. 당신의 길티플레저.

저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공부든 일이든 어떤 목적을 두고 읽어야 하는 새 책이고 다른 하나는 마냥 좋아서 여러 번 읽는 헌책입니다. 새로운 텍스트를 만날 때의 즐거움도 물론 크지만 저는 읽었던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 더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 까닭에 독서의 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죄책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반복해서 읽는가라는 것에서 두 번째 죄책감이 이어집니다. 젊은 시인이라면 왠지 전위성을 품고 있는 책이나 독특한 미감의 책을 즐겨 읽지 않을까? 하는 모종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가장 많이 읽은 책은 금아 피천득 선생의 '인연'입니다. 중학교를 다니던 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지금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읽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가장 자주 읽고 있는 책은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과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입니다. 이 책들은 하나같이 귀퉁이가 헐어 있습니다. 한 번 읽었던 책을 왜 다시 읽을까 하는 물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책이라는 것은 늘 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의 텍스트야 그대로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읽는 자신이 어떤 감정과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매번 다른 정서로 다가옵니다. 만날 때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4. 당신은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하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만든 책 중에 가장 성취감 높았던 책은.

저는 주로 문학 분야 책을 편집했습니다. 책은 ISBN이라는 코드가 찍혀 유통되는 상품이잖아요. 문학 출판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본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이 성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책을 이루고 있는 문학 작품은 자본보다는 문학과 예술의 논리가 더 우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충(相衝)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제가 편집한 모든 책들이 애틋하지만 그래도 한 권을 꼽자면 전성태 소설가의 '두번의 자화상'을 들고 싶습니다.

5.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인용구 하나.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시인의 '소금 창고'라는 시의 문장입니다.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는 지금도 무수한 과거의 기억들이 끼어들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