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Books팀장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1518~1594)의 '미의 세 여신'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와 님프 에우리노메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들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세 나신(裸身)을 누군가는 포르노로 소비하고, 또 다른 관객은 예술로 감탄하죠. 양쪽 사이에는 어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걸까요.

최근 번역된 C S 루이스(1898~1963)의 '오독'(誤讀·홍종락 옮김·홍성사刊)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더 잘 알려져있지만,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교수이자 비평가이기도 하죠. 이 책의 원제는 문학비평의 실험(An Experiment in Criticism). 1967년에 케임브리지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지만, 독서에 대한 고급한 에세이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가령 이런 주제. 취향에는 서열이 있는 것일까. 여성지를 소비하면 천격이고, 니체를 읽으면 교양있는 독자인가.

루이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는 '다수'와 '소수'를 구분합니다. 한 번 읽고 난 책은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대부분이죠. 마치 타버린 성냥, 써버린 기차표처럼. 하지만 어떤 소수는 같은 책을 열 번 스무 번 읽습니다. 이때 구분하는 개념이 '실용적 독서'와 '순전한 기쁨을 위한 독서'입니다.

물론 두부 자르듯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틴토레토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죠. 우리가 그림 앞에 앉는 이유는, 그 그림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림의 감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냐냐는 것.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명령은 이것이다. '항복하라, 보라, 귀기울이라, 그리고 받으라.'

현대사회에서 루이스의 명령을 100% 실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실용'을 위한 독서가 있고, '예술 감상'을 위한 독서가 있겠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독서가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귀한 경험을 좀 더 자주하고 싶은 건 분명합니다. 항복해서 보고 귀기울여 받으면, 스스로가 바뀌는 체험말이죠. 물론 포르노로 오독(誤讀)하더라도,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