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유네스코에 15세기 문화재라며 세계기록유산 신청을 한 어보(御寶·왕실 의례용 도장) 4점이 일제시대 원본이 도난돼 다시 제작한 '신품'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문화재청이 어보의 제작 연도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신청부터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이 18일“1471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덕종어보(2015년 환수)는 1924년 다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2016년 3월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669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했다. 그해 4월 미국 시애틀미술관에서 환수한 덕종어보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예종어보, 예종비 장순왕후 어보, 예종 계비 인순왕후 어보 등 4점이 포함됐다. 덕종어보 등 4점은 1924년 4월 서울 종묘에 보관돼 있다 도난당했다. "종묘 안에 깊이 두었던 어보분실사건으로 인하야 창덕궁 경찰서는 물론이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도 연합대활동을 한다"는 본지 1924년 4월 15일자 보도를 비롯, 당시 신문들은 어보 도난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하지만 도난당한 어보는 다시 찾지 못했고, 왕실 사무 관청인 이왕직은 도난 한 달 후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의뢰해 도난당한 어보를 다시 만들어 종묘에 보관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6월 일제시대 어보 도난 기사를 확인하고 본격 조사에 나섰다. 당시 도난당한 5점 중 현재 고궁박물관이 소장한 4점을 성분 분석한 결과 이 어보들은 1924년에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국에서 환수한 덕종어보는 물론,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던 예종어보 등이 언제 제작된 것인지도 검증하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덕종어보와 예종어보는 20세기에 제작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기록유산은커녕 국내 문화재 지정도 어렵게 됐다. 신승운 문화재위원장은 "국내 문화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 검증하고 그다음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순서를 따라야 한다"며 "조선왕실의궤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으나 작년에야 국내 문화재로 등록됐다. 세계유산 신청을 지나치게 서둘렀다"고 말했다.

1924년 어보 도난 사건을 보도한 본지 기사(왼쪽). 2015년 미국 시애틀미술관에서 환수한 덕종어보(오른쪽).

덕종어보가 일제시대 다시 제작된 사실을 확인하고도 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문화재청도 도마에 올랐다. 문화재청은 지난 1월에 1924년 제작 사실을 최종 확인하고 2월 홈페이지에서 덕종어보가 1924년 '재(再)제작품'이라고 슬그머니 수정했다. 환수 당시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일간지에 기고까지 하며 적극 홍보에 나섰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환수한 현종어보와 문정왕후어보를 전시하면서 덕종어보도 처음 일반 공개하기로 했고 오늘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년 말에 이미 진상을 알았던 전(前) 문화재위원 A씨는 "납득하기 어려운 옹색한 변명"이라고 했다.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은 오는 10월 파리에서 열릴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에서 최종 심사를 받는다. 문화재청 세계유산팀은 "당시 어보와 어책 669점을 등재 신청하면서 1411년부터 1928년까지 만들어진 기록유산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번 발견이 등재에 결정적 변수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지난달 환수한 현종어보와 문정왕후어보는 성분 분석 결과 진품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