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탈모 비누’ 사건을 보도한 1958년도 조선일보 기사들(위)과 “탈모 비누 때문에 머리털이 빠지는 게 아니라 고관들 모가지가 빠지게 됐다”고 풍자한 만평(경향신문 1958년 6월 11일자).

"이러다가 우리 국군 용사들 머리칼이 다 빠지는 거 아닌가…." 1958년 들어 전군 사병들이 군용 비누 때문에 탈모, 피부 통증 등의 고통을 겪는다는 호소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국산 비누 640만개가 미군 구매처의 검수를 통해 우리 군에 처음 보급된 이후 일어난 일이었다. 그해 5월엔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방부장관이 상공부장관에게 "어떻게 이런 비누를 만들 수가 있느냐"며 따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정부가 곧 조사에 나섰고 검찰도 수사를 시작했다. 샴푸도 없이 저질 비누로 머리를 감다가 피해를 본 사병은 전군 35개 부대에서 3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머리가 빠지고 피부가 아리다"고 호소했다(조선일보 1958년 6월 13일자).

처음에 '군납 비누 사건'으로 보도하던 신문들은 5월 하순부터 '탈모비누' 사건으로 제목을 붙였다. 문제의 비누들을 검사해 보니 우지(牛脂)를 너무 적게 넣은 탓에 비누 성분은 기준치의 3분의 1도 안 됐고, 피부에 해로운 탄산나트륨이 20%쯤 들어 있었다. 업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검찰 수사 결과 제조업자들이 정부 고관 및 미군 검수 관계자들에게 거액의 금품을 줬다는 충격적 진술이 나왔다. 사건은 불량품 군납 사건이 아니라 권력층 비리 사건이 되어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국회엔 '탈모비누 사건 조사반'까지 꾸려졌으며, 현직 상공·재무 장관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엄벌 지시를 내렸다.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패상을 드러낸 이 사건은 훗날 한 언론으로부터 1958년 3대 뉴스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조선일보는 1958년 5월부터 연말까지 이 사건과 관련한 기사를 55건이나 보도했다.

그러나 전 국민을 분노하게 한 이 사건의 수사는 용두사미가 돼 갔다. 법무부 고위층의 수사 중지 명령이 있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결국 검찰은 수사 개시 한 달 후에 2개 비누 제조업체의 임원 3명만을 사기 혐의로 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6개월씩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당국은 사건이 표면화된 직후엔 사병들에게 군용 비누를 쓰지 말라고 했다가, 3개월 뒤엔 그 비누로 몸은 씻지 말고 세탁용으로는 쓰라고 지시했다. 신문은 "세탁에만 쓰되 (털이 빠질지 모르니) 털옷 세탁에 쓸 때는 특히 조심하시길"이라고 이죽거렸다.

불량 군용 비누로 병사들이 입었던 피해는 비단 머리칼이 빠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피부가 헐고 따갑고 반점이 돋았다. 그런데도 그 비누는 다른 이름 다 놔두고 '탈모비누'로 불렸다. 60년 전에도 청년 장병들 머리칼이 우수수 빠진다는 건 다른 어떤 신체적 피해보다도 심각한 일이라고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80년 전 조선일보에도 '지는 나뭇잎보다 구슬픈 탈모'라는 표현이 보인다.

지난주 정부가 30조원을 들여 건강보험 적용 대상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탈모 치료비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 탈모인들이 "촛불시위라도 벌이겠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탈모 치료를 미용 성형이나 여드름 치료와 같은 반열에 놓고 '필수 기능 개선'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비판이 만만찮다. 오랜 옛날부터 탈모 극복이란 쌍꺼풀 수술이나 여드름 치료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심각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