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이어도 낮과 밤이 주는 인상은 판이하다. 특히 우리 문화재를 접할 때 더욱 그렇다. 어둠이 내린 늦은 시간, 전국 문화재의 또 다른 매력을 느껴 볼 프로그램이 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18개 시·군·구는 지난 5월부터 문화재청과 손잡고 '문화재 야행(夜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의 문화유산과 문화 콘텐츠를 활용해 역사·문화 체험의 장을 제공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운영 기간과 상관없이 그 중 몇 군데를 가져왔다. 문화재 자체와 그 야경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곳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기도 수원 화성 일대에선 공연·체험 등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방문객을 기다린다. 화성은 물론 근처의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전통문화관, 수원화성박물관을 야간에도 관람할 수 있다. 색다른 밤의 풍경을 감상하려면 화성 어차(御車), 플라잉수원(열기구)을 타면 된다.

화성행궁 광장 일대에는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한 대형 등불 작품이 설치됐다.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가 화성에 오색의 빛을 입히고, 음악 등으로 작품을 표현한다. 화성행궁 공방길과 장안공원에서는 야간 장터가 마련돼 전통공예와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야간 순라군이 성곽길에서 재현되며 정조대왕의 야간 나들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 인근에는 지역 명소인 '통닭거리'도 자리 잡고 있다.

[수원 곳곳서 야경 등 8야(夜) 주제로 '수원 야행' 진행]

전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의 도시로 한해 1000만 관광객이 찾는다. 거리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인류의 수작으로 거듭난 우리 문화유산의 향연이 펼쳐진다. 먼저, '경기전 광장'에선 전주를 찾은 관광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본격적인 전주의 밤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어진 수호단의 검무가 시작된다. 그리고 검무가 종료되는 순간, 태조 이성계가 나타나 전주 문화재 야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린다.

(왼쪽부터) 5월 27일 경기전 광장 앞 다음국악관혁악단의 연주 모습·중앙초에 뜬 천년의 달 미러볼이 비춰진 한옥마을의 전경·경기전 광장 앞 전주기접놀이의 아름다운 공연 모습.

광장에선 매달 다양한 주제로 공연이 펼쳐지는데, 이는 대한민국을 넘어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우리 문화유산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은은한 빛이 야간 여행의 멋을 더해 준다. 태조로 거리를 주황빛으로 물들인 한지등과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행렬 반차도'가 그려진 한지등, 하늘에서 빛을 쏟아내는 '천년의 달' 대형 미러볼까지. 형형 색색의 빛으로 물든 한옥마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통 한옥·한식·한지까지… 전북에서 '韓 스타일'로 놀자]

[맛깔나는 전주 여행의 완성,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

[전주 한옥마을 한 해 관광객 1000만 첫 돌파]

정림사지.

부여는 123년간 국력 신장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쳐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역사문화의 고장으로 백제의 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백제금동대향로 등 국보 4점을 비롯한 국가지정 문화재 52점과 등록문화재 3점, 도 지정 문화재 57점 등 다양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2015년 7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등 4개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역사문화 도시로서의 이미지가 한층 높아졌다.

(왼쪽부터) 신동엽 문학관·백제 문화단지·궁남지 사계.

부여에서는 여름밤과 함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즐기는 '사비 야행'이 7월~8월 매주 토요일 충남 부여읍 일원에서 운영 중이다. 7월에 진행된 '연꽃야 투어'에 이어, 8월의 '사비야 투어'는 조명으로 새롭게 단장된 관북리 유적과 궁남지 정림사지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백마강을 오가는 황포돛배에서 낙화암과 오색 조명을 배경으로 선상 공연이 펼쳐지며, 이 기간에 부여읍 달밤 시장에서는 미마지 공연단과 서동선화 퍼레이드단의 공연, 주 무대가 설치된 정림사지 돌담길에서는 문화 체험장과 달빛 포토존도 조성된다.

[해가 지면… 백제 마지막 도읍의 精髓가 떠오른다]

["역시 세계문화유산"… 부여 전체가 노천 박물관]

전북 군산의 야행 주제는 '여름밤, 근대 문화유산 거리를 걷다'이다. 과거 국제 무역항이었던 군산의 모습과 근대 문화유산이 전시된 근대역사박물관에서 탐방을 시작한다. 이곳부터 옛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초원사진관~신흥동 일본식가옥~동국사로 이어지는 2㎞ 길을 걸으며 역사 이야기를 듣고, 전시·공연을 즐길 수 있다. '군산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만담 공연, 시립예술단 특별 공연, 군산야행 빛의 거리, 군산 해망굴 복원 전시 체험관, 문화재 3D 증강 현실 체험 등이 마련됐다. 월명동 일원엔 근대 문화유산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이 모여 있다.

월영교 야경.

20년 전 안동 고성 이씨 집안의 무덤에서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한글 편지가 발견됐다. 1586년에 '원이 엄마'가 남편 이응태의 관 속에 미투리(삼이나 노 등으로 짚신처럼 만든 신) 한 켤레와 함께 넣어둔 것이다. 원이 엄마는 병석의 남편이 쾌유하길 기원하며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 줄기로 미투리를 삼았다. 하지만 남편이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라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았다.

(왼쪽부터) 안동 유교랜드 야경·월영교·낙동강 음악분수

안동 민속촌의 호반 나들잇길엔 '원이 엄마 테마길'이 있다. 시가 35억 원을 들여 2003년에 안동 조정지댐 안에 만든 월영교(月映橋)가 미투리 모양인 이유도 원이 엄마의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폭 3.6m, 길이 387m인 월영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목책 인도교이기도 하다. 2012년부터 최근까지 300여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암흑과 불빛과 물빛이 만난… 夜色 속을 걷다, 사색 속으로 접어들다]

[아희야! 꽃 폈단다, 궁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