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증세(增稅)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정부는 조세 저항을 의식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치인 출신 실세 장관이 총대를 메고 증세의 공론화를 시도하는 모양새다.

◇추미애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만 증세하자"

20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여당 대표로 참석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를 대상으로 한 증세론을 주장했다. 추 대표는 법인세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이 되는 금액)이 2000억원을 넘는 기업에 대해 세율을 현행 22%에서 25%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이 범주에 해당되는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100여 곳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 대표는 소득세에 대해서도 과세표준 5억원 초과인 경우에 대해 40%를 적용하는 현재 최고세율을 42%로 높이자고 제안했다. 과세표준 5억원을 초과하는 사람들은 약 4만6000명(근로·종합·양도소득세 합계) 정도인데, 소득세 납부자(1465만명)의 0.3% 정도다. 이에 대한 세수 증대 효과는 아직 분석되지 않고 있지만 세제 전문가들은 "초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매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뿐 눈에 띌 정도로 세수가 확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무현 정신 승계하는 행보?

추 대표와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 등이 꺼낸 증세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장기적인 국가 비전을 설계하겠다며 내놓은 '비전 2030'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30년까지 만들어나갈 새 국가 모델을 제시했는데, 매년 집행하는 예산 외에 1100조원이라는 막대한 돈이 추가로 들어가야 하는 청사진이었다. 비전 2030을 만든 당시 기획예산처는 ①증세 ②국채 발행 ③증세+국채 발행의 세 가지 재원 조달 방안을 제시하면서 "국민이 어느 정도 복지 수준을 얼마만큼 부담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증세론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비전 2030이 증세 논란을 낳자 노 전 대통령은 부산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세금을) 저도 못 올리고 올려보지도 못하고 돈이 이만큼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계산서 내놓았다가 박살 나게 또 맞고 물러갑니다"라고 한탄했다.

◇여당이 총대 메고 청와대가 지원 사격

증세론이 제기된 이유로는 문 대통령이 제시한 국정 과제를 실천하는 데 돈이 모자라는 것 아니냐는 현실적 계산도 깔려 있다. 정부는 전날 100대 국정 과제를 이행하는 데 5년 동안 총 178조원이 든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곳에 쓰고 있는 예산을 줄이는 세출 절감으로 95조4000억원을 끌어오고, 세입 확충(늘어날 세금 수입)으로 82조6000억원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세입 확충으로 마련하겠다는 82조6000억원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기초한 것이라 증세로 충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첫 국가재정전략회의… 黨·政·靑 수뇌부 한자리 -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앞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 문 대통령, 추 대표, 이낙연 국무총리,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08년에 설립된 기획재정부]

[민주당이 깃발 든 '부자 증세론']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자산가를 상대로 비과세·감면을 줄이더라도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의 세금 감면 혜택을 늘릴 방침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비과세·감면에 따른 세수 증가 효과는 상쇄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5년 내내 올해처럼 세수가 기대 이상으로 잘 걷힌다는 보장도 없다.

증세와 관련해 청와대와 여권은 민주당이 전면에 서고 청와대와 정부는 일단 뒤로 빠지는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이날 추 대표가 증세 방침을 밝히자, 청와대는 "당이 세제 개편 방안을 건의해옴에 따라 민주당과 정부와 함께 관련 내용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