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진료를 못 하겠소. 모든 프랑스인은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요."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독일의 소도시 크베들린부르크. 전쟁 중 아들 '프란츠'를 잃은 의사 '한스'(에른스트 슈퇴츠너)는 이렇게 절규한다. 프란츠의 시신을 확인할 길조차 없어 마을 묘지에 마련한 가묘(假墓)에 어느 날 프랑스 청년이 장미꽃을 놓고 간다. 프란츠의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약혼녀 '안나'(파울라 베어)는 호기심에 이 프랑스인을 뒤쫓는다. 전쟁 직전 파리에 머물 당시 프란츠의 친구였던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다. 아드리앙은 가슴속에 묻어뒀던 사연을 안나에게 조금씩 털어놓는다.

영화‘프란츠’에서 프랑스인‘아드리앙’(피에르 니네·왼쪽)은 1차 대전 당시 세상을 떠난 프란츠의 약혼녀‘안나’(파울라 베어)에게 가슴속에 묻어뒀던 사연을 고백한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프란츠'는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수아 오종(50)의 신작이다. 오종은 '8명의 여인들'(2002)과 '스위밍 풀'(2003) 같은 작품들로 프랑스 영화계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 발표한 작품마다 범작(凡作)이나 태작(

作)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며 기나긴 슬럼프에 빠진 듯했다. 오종은 독일계 미국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의 1932년작 '내가 죽인 남자'의 리메이크인 이번 영화를 통해 전후(戰後)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도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지 진지하게 되묻는다.

영화에서 독일 청년 프란츠와 프랑스의 아드리앙은 우수(憂愁)에 찬 표정과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물론, 마네의 그림을 좋아하는 예술적 취향까지 빼닮았다. "프랑스 아이들은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아이들은 프랑스어를 배우는데, 정작 자라난 뒤에는 서로를 죽여야 한다니…"라는 프란츠의 편지처럼, 두 청년의 공통분모는 영화의 비극적 출발점이 된다.

프란츠 묘소에 헌화하는 '아드리앙'을 바라보는 '안나'.

영화는 아드리앙이 비밀을 털어놓는 중반 장면을 기점으로 정확히 양분된다. 전반부가 두 청년의 사연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라면, 후반부는 참혹한 진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지 되묻는 시대극에 가깝다. 대부분 흑백 화면인 영화 초반부는 대사와 음악까지 절제돼 차분함을 유지한다. 폴 베를렌의 시(詩)와 마네의 그림, 드뷔시의 가곡까지 프랑스 예술을 적극 활용해 풍성한 느낌을 안긴다. 등장인물들이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중반부터 간간이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화면이 인상적이다. 오종 감독의 '화려한 부활'까지는 아니어도, '성공적 재기(再起)'는 조심스럽게 점쳐볼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