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길거리 문화 흡수해 소비자 호응얻자, 경쟁적으로 독립 예술가들 디자인 표절
'이케아 가방' 논란 발렌시아가, 이번엔 미국 래퍼 앨범 디자인 도용 의혹
샤넬도 표절 논란에 사과… 젊어지는 명품, 패러디와 표절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디자인 도용 논란에 휩싸인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왼쪽)와 구찌의 알렉산드로 미켈레(오른쪽), 공교롭게도 이들은 혁신과 변화로 브랜드를 성공으로 이끈 인물들이다.

디자인 표절의 만년 피해자였던 명품들이 잇따른 ‘역 표절’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명품에 디자인을 도용당했다는 피해자들이 소규모 창작자들이어서 더욱 공분을 사고 있다. 영감, 패러디, 오마주 등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반복되는 패션 디자인 방식이 표절 의혹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샤넬의 창업자 가브리엘 샤넬은 “독창적인 디자이너라면 표절 당할 각오를 해라”라며 자신의 디자인을 도용하는 것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패션계의 디자인 표절은 대개 명품 브랜드를 대중 브랜드가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그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명품이 길거리 문화와 하위문화를 고급스럽게 풀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역 표절’ 현상이 퍼지고 있다.

◆ ‘이케아 가방’ 논란 발렌시아가, 이번에는 독립 예술가 디자인 도용해 구설수

앞서 구찌가 독립 디자이너의 창작물 도용으로 도마 위에 오른 데 이어, 같은 케어링 그룹의 인기 명품, 발렌시아가도 표절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미국의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스위츠 비츠(Swizz Beatz)가 자신이 속해있던 그룹 ‘퍼프 라이더스(Ruff Ryders)’가 2000년에 선보인 레코드 라벨을 발렌시아가가 표절했다고 주장하면서다.

발렌시아가 2018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왼쪽)과 러프 라이더스 레코드 라벨을 활용한 셔츠(오른쪽)

문제가 된 제품은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 등장한 셔츠로, 퍼프 라이더스의 ‘R’ 로고와 비슷한 ‘B’ 모티브가 들어가 있다. 모티브가 반복되는 방식도 유사성이 짙다. 스위츠 비츠의 인스타그램에는 “발렌시아가는 러프 라이더스에 입금해라”, “이 로고는 셔츠라기보다는 러프 라이더스의 상징이다”라는 등의 댓글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발렌시아가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현재 홈페이지의 컬렉션 게시물에서는 해당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발렌시아가의 디렉터이자 베트멍의 수장인 뎀나 바잘리아는 택배 회사 DHL의 로고 티셔츠와 이케아 장바구니를 차용한 파란색 가방 등 대중문화를 패러디한 제품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도용한 짝퉁에 대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기보다는 이를 또다시 재해석한 제품을 출시해 해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상의 저가품을 값비싼 하이패션으로 둔갑시키는 그의 디자인 방식은 늘 논란거리가 됐지만, 대체로 기존의 것을 재해석했다는 참신함으로 포장됐다. 그를 두고 일각에서는 “패션계의 뒤샹”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결이 다르다. 문화가 아닌 특정인의 아이디어를 도용했기 때문이다.

◆ 샤넬도 디자인 도용으로 사과… 젊어지는 명품, 패러디와 표절 사이 아슬아슬 줄타기

스코틀랜드 니트 디자이너 마티 벤틸리온의 페어 아일 니트(왼쪽)과 이를 표절해 논란을 빚은 2015 샤넬 공방 컬렉션(오른쪽)

샤넬도 디자인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샤넬은 2015년 이탈리아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공방 컬렉션(Métiers d’Art collection)에서 스코틀랜드의 페어 아일(Fair Isle) 니트 디자이너 마티 벤틸리온(Mati Ventrillon)의 제품과 유사한 디자인을 출품해 물의를 빚었다. 특히 쇼에 앞서 샤넬의 디자인팀이 시장조사 차 그의 제품을 사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디자인 도용을 시인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명품 업계의 불황과 맞물려 명품은 혁신과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일부 특권층을 겨냥한 폐쇄적인 마케팅이 아닌, 디지털과 길거리 문화 등을 접목한 소비자 친화적인 전략으로 신규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밀레니얼 소비자를 위해 6개월 앞서 펼치던 패션쇼 방식도,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바로 제품을 판매하는 ‘See Now Buy Now’ 형식으로 바꾸는 추세다.

이른바 ‘럭셔리 민주주의’가 성행하면서 명품 디자인 역시 하위문화와 반문화를 고급스럽게 풀어내는 패러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모스키노의 제레미 스콧은 맥도날드와 테디베어, 세제 등을 모티브로 명품을 재창조했으며, 루이비통의 팀 존스는 뉴욕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과 협업해 길거리 문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맥도날드를 모티브로 한 모스키노의 2014 가을/겨울 컬렉션(왼쪽)과 세제 용기를 차용한 ‘프레시’ 향수(오른쪽)

이번 역 표절 논란의 주인공인 구찌와 발렌시아가 역시 변화의 물결을 빠르게 수용한 결과 대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명품 업계의 잇따른 역 표절 논쟁은 명품이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류로 해석된다. 문턱을 낮추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장인정신과 헤리티지로 위상을 누려온 명품이 소규모 창작자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건 정체성의 훼손이자 대기업의 횡포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변화와 패러디, 유머도 좋지만 명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체적인 기준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