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 서울역에 있고, 열차 시간까지 1시간가량 남아 있다면 '시간여행'을 떠날 절호의 기회다. 기차를 놓쳐 다음 열차를 두세 시간 기다려야 한다면 금상첨화. 시간여행은 물론 덤으로 영화도 볼 수 있다. 그것도 공짜로!

옛 서울역 입구에 설치된‘문: 펼쳐진 시공간’. 붉은 통로로 들어서면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옛 서울역 건물인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여행자의 시계' 전시 이야기. 개막 6주 만에 관람객 50만명을 돌파했다. 마침 서울로가 개장해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왔다.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미래로 떠나는 여행. 입구에 세워놓은 아치형 붉은 구조물 '문: 펼쳐진 시공간'(다이아거날 써츠 작)으로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시간여행자'가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머릿속은 말끔히 비워낼 것. 문지기가 나눠주는 노란 종이에 잊고 싶은 기억을 낱낱이 적어 '시간휴지통'(김사라 작)에 던져버리면 된다.

잊고 싶은 기억은 휴지통에!

17인의 작가와 떠나는 '시간여행'은 당신의 부모,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열차 시각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리던 옛 서울역 중앙홀에서 시작된다. 은빛 숲처럼 보이는 풍경은 아크릴 판에 색필름을 붙여 햇빛에 반사시킨 '기억의 잡초들'이다. 잊은 줄 알았는데 잡초처럼 쑥쑥 솟아나는 기억에 머리를 흔들지만, 덧없는 '상념'은 오르골 선율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낡은 TV 10여 대는 가난이 덕지덕지 붙은 '방'들을 비추며 얼룩진 벽지 속에 밴 어린 시절 추억을 불러낸다. 모두 홍범 작품.

중앙홀을 벗어나 1·2등 대합실로 들어서면 시계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로 돌아간다. 조준용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스물다섯 아버지가 찍은 흑백사진들을 실크에 프린트한 뒤 그 무렵 건설돼 지금까지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영상에 투사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공간을 연결한 '남쪽의 기억, 416km'. 역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하석준의 인터랙티브 아트 '수도자―고통의 플랫폼'은 시간여행자들이 가장 열광하는 코너다. 로봇 형상의 수도자가 짊어진 2대의 대형 TV 모니터 앞에 서서 몸을 움직이면 고졸한 옛 서울역 풍경 위로 '현재 나의 몸짓'이 겹쳐 물결친다.

그녀가 벽에 머리를 처박은 이유

2층 역장실 앞 복도도 붐빈다. 벽에 머리를 처박고 선 여인 때문이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관람객들이 그 뒤로 줄 서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프랑스 작가 다니엘 피르망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에 붙들린 존재를 은유하려 3D스캔으로 제작한 '플로렌스(태도)' 시리즈 중 하나. 우주의 괴생명체를 연상시키는 박제성의 '더 스트럭처' 영상도 흥미롭다. 놀이기구들의 작동 방향과 시간을 거꾸로 돌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4차원의 세계를 형상화했다. 손영득의 '외발자전거로 그리다'도 기발하다. 바퀴가 하나뿐인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가 '역사여행'을 시작한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부터 87년 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페달 밟는 속도에 따라 스쳐 지나간다. 신수진 예술감독은 "1925년 세워진 서울역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 체험을 하는 데 더없이 좋은 공간"이라며 "서울역이라는 공간을 활용한 전시를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전시 중인 손영득의‘외발자전거로 그리다’. 관람객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우리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영상을 타고 흘러간다.

부인대합실에선 '설국열차' '인터스텔라' '은하철도 999' '공각기동대' 등 시간을 주제로 한 영화 36편이 무료 상영되니 스케줄 체크는 필수. 연극, 낭독, 무용 등 3등대합실에서 펼쳐지는 공연도 언제나 만석이다. 프로그램 일정은 www. seoul284.org. 7월 23일까지. (02)340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