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아시아서 언론 가치를 수호해온 요새]

["신간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창립 주도했다"]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대변지로 민족정당에서 민족경제와 문화산업 육성까지 다방면의 활동에 앞장섰고 이를 회사 발전 동력으로 연결시켰다."

'신간회와 조선일보'를 발표한 조맹기 서강대 명예교수는 신간회와 조선일보의 관계를 중앙과 지방, 정치·산업·문화 등 다각적으로 조명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민족협동전선' '민족단일당'을 내걸었던 신간회는 사상단체와 정치단체의 중간에 위치했는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로 강한 당파성을 띠었던 조선일보가 주도하면서 민족주의 정치단체의 색깔을 분명히 하게 됐다. 그는 "한말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계몽적 성격을 지니고 느슨한 관계를 유지했던 데 비해 조선일보와 신간회의 관계는 훨씬 더 정치적이고 밀접했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와 신간회의 결합은 영업국과 편집국 지방부를 매개로 전국 각지의 조선일보 지국이 신간회 지회 역할을 맡으면서 강화됐다.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모여 있던 조선일보 지국은 기사 작성과 판매·광고 등 고유 기능 이외에도 신간회와 관련된 연설회·집회 등 계몽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신간회 총무간사였던 이승복 조선일보 영업국장, 신간회 조사부 간사로 조선일보 지방부장·문화부장이었던 국어학자 장지영 등이 이런 움직임을 주도했다.

조선일보가 신간회와 함께 벌인 문자보급운동, 생활개신(改新)운동 등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개선하는 동시에 조선일보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문맹률이 70~80%나 되는 상황에서는 민족을 위한 사회문화 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어렵고 신문의 독자 증가도 한계가 있었다. 물산장려, 금주 금연, 협동조합, 색의(色衣) 착용, 허례(虛禮) 폐지 등은 조선일보의 주장이 신간회 사업으로 확장된 것이었고 조선일보 주필·사장을 역임한 안재홍이 앞장서 추진했다.

조맹기 교수는 "조선일보와 신간회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 얼을 살리고 대중을 계몽시키고 민족문화와 산업을 향상시키는 사회개혁 운동을 함께 전개한 사실상 동일체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