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포도밭 한가운데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물체'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은색·금색·보라색 알루미늄 포일을 기다랗게 구불구불 잘라 감싸놓은 듯한,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적인 외관. 불시착한 외계인의 UFO라고 해도 믿을 듯하다.

석양을 받아 붉은 와인 빛깔로 빛나는 ‘와인시티’. 스페인 리오하 와인업체 ‘마르케스 데 리스칼’에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의뢰해 만든 복합 와인 문화 공간이다.

스페인 최대 와인 산지 리오하(Rioja)의 평온하고 목가적인 풍경과 대비되는 이 이질적인 최첨단 건축물은 리오하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업체 중 하나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Marques de Risc al)' 본사다. 정식 명칭은 '와인시티(Wine City)'.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창립 150주년을 맞은 2006년 문 열었다. 프랑스의 세계적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으로부터 별 1개(최고 3개)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과 캐주얼 레스토랑, 와인바, 테라스, 와인 관련 서적을 구비한 도서관, 부티크 호텔, 포도씨와 껍질을 활용하는 스파, 와인숍을 갖춘 복합 와인 문화 공간이다.

와인시티 지하 와인셀러.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150년 넘는 역사 동안 생산한 모든 빈티지(생산 연도)의 와인을 저장하고 있다.

건축에 대해 조금만 관심 있다면 와인시티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매우 닮았음을 대번에 알아차릴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와인시티를 디자인한 이가 빌바오 구겐하임도 디자인한 캐나다 출신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Gehry)이다. 얇은 티타늄 판을 이어 붙인 모양새가 마치 서명처럼 게리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게 한다. 은색 티타늄 판만을 사용한 빌바오 구겐하임과 달리, 와인시티는 은색 티타늄 판과 함께 보라색과 금색을 입힌 티타늄 판을 리본처럼 길게 잘라 겹치게 이어붙였다. 게리는 "잔에 따라지는 와인을 형상화하려 했다"며 "보라색은 와인을, 은색은 코르크 마개에 덧씌워진 은박지를, 금색은 와인병을 감싼 금색 그물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자사 와인이 인기를 끌며 모조품이 시장에 등장하자 차별화를 위해 금색 그물망으로 와인병을 감쌌고, 이 금색 그물망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인 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됐다.

기원전 2세기부터 와인을 생산해온 리오하에서는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최첨단 와이너리 짓는 건축 붐이 2000년대 초 일어났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과 함께 리오하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인 비냐 톤도니아(Vina Tondonia)는 1910년 브뤼셀 만국박람회 때 설치했던 부스 구조물을 되살리기로 결정한다. 이 오래된 구조물을 감싸 보호하기 위한 건물을 고(故) 자하 하디드(Hadid)에게 맡겼다. 하디드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이라크계 영국 건축가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현재 이 건물은 방문객을 위한 시음실과 와인숍으로 활용되고 있다.

파도치는 듯한 알루미늄 지붕이 리오하를 둘러싼 산맥과 조화롭다고 평가받는 ‘보데가스 이시오스’ 와이너리. 스페인의 세계적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했다.

보데가스 이시오스(Bodegas Ysios)는 스페인의 세계적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Calatrava)에게 신축 와이너리 설계를 부탁했다. 파도 치듯 구불거리는 알루미늄 지붕은 리오하 북쪽을 감싼 시에라 칸타브리아 산맥과 기막히게 어울린다고 평가받는다. 이 밖에 프랑스 건축가 필립 마지에르(Mazieres)가 설계한 비냐 레알(Vina Real), 스페인 스타 건축가 이그나시오 케마다(Quemada)의 보데가스 후안 알코르타(Bodegas Juan Alcorta), 이나키 아스피아수(Aspiazu)의 보데가스 바이고리(Bodegas Baigorri)가 모두 2000년부터 2010년 사이 세워졌다.

1994년산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인. 금색 그물망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다.

리오하 와인 업체들이 첨단 건축에 관심 가진 게 최근만의 현상은 아니다. 쿠네(CVNE)는 창립 20주년을 맞은 1899년 와인셀러를 재건축하면서 구스타브 에펠(Eiffel)에게 설계를 맡겼다. 파리 에펠탑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 설계에도 참여한 바로 그 에펠이다. 에펠은 돌기둥 대신 강철 트러스(truss)를 사용했다.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거치적거리는 기둥이 없는 포도주 판매자는 와인을 이동하고 관리하기가 훨씬 편리했다.

쿠네가 에펠에게 와인셀러 설계를 의뢰한 건 시설 혁신을 위해서였지만, 최근 리오하의 첨단 건축 붐은 '마케팅' '광고' '홍보'가 주요 목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관계자는 "제한된 예산을 가지고 전 세계에 우리를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마케팅 캠페인의 대안으로 '건축'을 선택했다"고 했다. 비냐 톤도니아 관계자는 "세계적 수준의 와인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세계적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다"고 했다.

최첨단 와이너리 건물을 거대한 광고판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은 성공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매년 10만명 가까운 방문객이 찾는 리오하의 명소가 됐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관계자는 "단지 게리의 건축물을 감상하기 위해 오더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건물 보러 왔다가 시음장에서 와인을 맛보고, 와인숍에서 와인을 구매하고, 레스토랑에서 먹고, 호텔에서 숙박합니다. 우리 와인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와인시티에는 최고급 부티크 호텔도 있다. 사진은 ‘프랭크 게리 스위트’ 객실.

진한 '템프라니요' 풍미… 콜라 섞어 리오하式 칵테일 즐겨볼까

진한 ‘템프라니요’ 풍미… 콜라 섞어 리오하式 칵테일 즐겨볼까

와인 산지마다 대표 포도 품종이 있다. 리오하 레드와인의 주인공은 템프라니요(tempranillo). 체리, 블랙베리 등 과일 향과 꽃·향신료 향이 도드라진다. 오크통 숙성을 거치며 바닐라향과 빵, 초콜릿, 코코아, 담배 향 등 다양한 향이 더해지면서 풍부하고 복합적인 와인 풍미를 낸다. 품질·숙성 기간에 따라 비노 호벤(‘젊은 와인’·보통 표기하지 않음), 크리안자(오크통·병 숙성 2년), 레세르바(오크통·병 숙성 3년), 그란 레세르바(오크통·병 숙성 5년)로 나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인은 국내에서 등급 따라 3만~20만원대, 쿠네 와인은 3만~12만원대에 판다.

리오하는 일반 관광객이 방문하기 쉽지 않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주요 관광지에서 연결되는 대중교통 편이 많지 않다. 렌터카가 가장 편리하다. 리오하 와이너리를 소개하고 연결해주는 웹사이트(rutasdelvinorioja.com)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리오하의 주도(州都)이며 제일 큰 도시인 로그로뇨(Logrono)는 와인 투어 거점으로 알맞다. 로그로뇨 시내 라우렐 골목(Calle del Laurel)을 중심으로 거대한 타파스 구역이 형성돼 있다. 리오하 전통 요리 양갈비 구이도 별미. 어린 양의 갈비를 포도나무 가지로 굽는데, 한국의 삼겹살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칼리모초(Calimotxo)는 리오하 레드와인과 콜라를 섞은 리오하식 칵테일이다. 럼(Rum)과 콜라를 섞은 ‘쿠바 리브레(Cuba Libre)’와 비슷해 ‘리오하 리브레(Rioja Libre)’라고 부르기도 한다.

맞춤형 프리미엄 여행사 뚜르디메디치는 리오하 와이너리 투어가 포함된 북(北)스페인 미식 여행 상품을 판매한다. 문의 (02)849-8580, tourdimedic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