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군 이종 가문의 멸족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과 후궁 영월 신씨의 셋째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1407~1453)은 아들이 없었다. 하여 동생 근녕군(謹寧君) 이농의 둘째 아들 우산군(牛山君) 이종을 양자로 들였다. 우산군과 아내 문화 류씨 사이에 여섯 형제가 태어났다. 모두 총명하여 입신양명하니 가문이 번창하였다. 둘째 아들 무풍군 이총은 특히나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504년 이총이 죽었다.

무오사화로 함경도로 유배 중이던 이총은 갑자사화 때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당한 뒤 거제도로 다시 유배당했다. 그리고 교수형을 당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시신에게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형벌, 능지(陵遲) 형을 가했다. 그 목은 서울 거리에 걸어놓았다. 남은 시신도 온전하지 못했다. 이듬해 음력 1월 26일 자 실록에는 당시 왕이 내린 명령이 이리 적혀 있다. "이총의 뼈를 부순 후 가루를 강 건너에 날려버리라."

아버지 우산군, 다섯 형제와 함께 연산군에 의해 죽은 무풍군 이총의 묘.

총명하되 불우했던 사내가 바람에 날아가고 한 해가 지났다. 이총의 아버지 우산군 이종, 맏형 이원과 네 동생 정, 간, 변, 건이 죽었다. 각기 다른 곳에 유배됐던 사내들이 같은 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기 1506년 음력 6월 24일이다. 우산군을 포함해 이들 일곱 부자를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한 가문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그 군주는 연산군이다. 팔극조정과 환가탄생 조선 9대 임금은 성종이다. 풍수학에서 전하는 설화다. 어느 날 조정회의에 문득 보니 장차관 가운데 극(克)자 돌림을 쓰는 자가 여럿 보였다. 영의정 이극배, 우의정 이극균, 병조판서 이극증, 형조판서 이극감, 공조판서 이극기, 병조참의 이극규, 좌통례 이극견까지 국무총리부터 의전 담당 비서까지 여덟이나 되었다. 모두 광주 이씨다. 세간에서는 이를 일러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 했다. 한 가문이 그리 창대하니 왕이라고 부러움이 없을 리 없다. 하여 성종은 지금 서울 정동에 있었던 광주 이씨 종가를 빌려 자손을 낳았다. 풍수학에서는 이를 환가탄생(換家誕生)이라 부른다. 공식적으로 성종은 왕후 4명과 후궁 8명으로부터 왕자 16명, 공주와 옹주 12명을 두고 나이 37세에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성종의 첫아들은 대궐 안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으니 환가탄생에 따른 덕과 득은 이 왕자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 아들이 연산군이다.

폭군 연산군 성종의 맏아들로서 세자가 된 연산군은 그 누가 보더라도 조선 왕실 정통성을 잇는 후계자였다. 문제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였다. TV 드라마는 물론 영화 소재로도 단골로 등장하는 폐비 윤씨와 연산군 이야기다. '…어느 순간 성종 사랑을 상실한 윤씨가 임금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버리고, 평민으로 내쫓긴 윤씨는 결국 사약을 먹고 죽었다. 영민했던 아들 연산군은 왕이 되고 10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미쳐 버려'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다 폐위되었다….' 친모 이야기를 듣고서 연산군은 '윤씨묘'로 남아 있던 어머니 묘를 왕릉으로 격상시키고 회릉이라 명했다. 회릉은 원래 지금 서울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회릉 주변 지역을 지금 회기동이라고 한다. 회릉은 지금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져 있다. 그러니까 연산군은 불우한 가정사가 만든 폭군이었지 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강화도 교동에 있는 연산군 유배 추정지 중 한곳. 기록이 없는 탓에 확실하지 않다.

조선 정치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투쟁사다.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흥사대부 세력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이래, 전주 이씨 왕실 권력과 사대부 관료 권력은 주도권 경쟁을 벌이며 500년을 존속했다. 연산군 시대는 약화된 권력을 신권으로부터 과격하게 회수하려는 시대였다. 이런 관점에서는 "연산군은 과격한 왕권주의자였지 폭군은 아니었다"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는 백성을 위함이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도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성까지 폭력으로 탄압하면, 폭군(暴君)이다. 연산군 금표(禁標) 1994년 11월 중순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한 묘역에서 오래된 비석이 발견됐다. 높이 1.38m, 폭 54㎝, 두께 22.5㎝짜리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 '금표 내에 침범한 자는 기훼제서율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기훼제서율'은 임금이 정한 법률을 어기는 죄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길가에 서 있는 연산군 금표비. “수도권 전역을 자기 사냥터로 만들고 백성들을 쫓아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1994년 연산군에 의해 멸족당한 우산군 일곱 부자 가족묘역에서 발견됐다.

대표적인 기훼제서율이 1504년 연산군이 공포한 한글사용금지법이다. 언문으로 임금을 비난하는 글이 난무하자 아예 한글을 금지한 법률이다. 대자동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금표 구역 침입범을 이 한글사용금지법 위반자와 동일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處斬(처참)'은 참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참형은 목을 잘라 죽이는 형벌이다. 도대체 이 금표는 무엇인가. 집권 초기부터 토지에 관심을 보이던 연산군은 궁궐 주변에서 시작해 민가를 철거시키고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갔다. 집권 9년째인 1503년 음력 11월에는 선친 성종 후궁들이 살고 있는 자수궁과 수성궁까지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연산군은 "부득이한 일이다"라며 무시하고 관철시켰다. 며칠 후 "겨울이라 민가 철거가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리 답했다. "일단 백성들을 먼저 내보내고, 날이 풀리면 집을 철거시키라." 백성들을 내쫓고 차지한 토지에 연산군이 세운 비석이 금표(禁標)다. 실록 기록에만 남아 있던 그 금표가 근 500년 세월이 지난 1994년에 고양시에서 실물로 발견된 것이다. 백성이 하늘이거늘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왕의 사냥터이니, 이 비석 안쪽으로 침범한 자는 목을 베어 죽인다.’

실록 기록을 모아 보면 이렇다. "남산에 봉수대가 있는데, 금표 안에 있으니 어찌하리까." "봉수는 변방 일의 유무를 보고할 뿐이니, 모든 봉수를 폐지하라."(연산군 10년·1504년 음력 11월 1일) "금표 안을 범한 사람 천동(千同)은 머리를 베어, 전례대로 금표 근처에 내걸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라."(1504년 11월 3일) 급기야 연산군은 서울을 에워싼 수도권지역을 자기 사냥터와 유락지로 선포하고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 지역이 고양, 파주, 양주, 포천, 광주, 김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철거 현황이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인용해본다. 우찬성 이계동(李季仝)이 동·서·북 금표 지도를 가지고 아뢰기를, "동쪽은 한강 삼전도, 광진, 묘적산, 추현, 천마산, 마산, 주엽산으로부터 북쪽은 석점, 홍복산, 해유점까지 서쪽은 파주 보곡현까지 남쪽은 한강 노량진, 용산 양화도까지인데, 동쪽은 70리, 서쪽은 60리, 북쪽은 65리, 남쪽은 10리입니다." 보고를 받은 연산군이 곧바로 이렇게 지시한다. "한강 망원정(望遠亭) 근처를 다시 살펴보아 표를 세우라."(연산군 10년·1504년 11월 9일) "예로부터 제왕은 누구나 연회를 베풀고 놀이하는 곳이 있었다. 장의문 밖의 산이 밝고 물이 고와 참으로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이궁(離宮)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하고자 한다."(연산군 11년·1505년 7월 1일) 고양에 사는 목동은 소에게 풀을 먹이지 못하게 되었고 김포에 사는 뱃사공은 물길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법을 어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하였다.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정치의 제1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말이다. 결국 연산군 재위 12년, 다음과 같은 세상이 오고야 말았다.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뒤편 왼쪽).

“부역이 번거로워 백성들은 살 길이 없으므로, 많이 모여서 도둑이 되어 사람과 물건을 겁탈했다. 길가는 사람이 끊어지기도 하고 각 도에서 바치는 공물까지 약탈당했다. 금표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도둑들이 금표를 보금자리 삼아 날로 죽이고 약탈했다. 아무리 서울의 즐비하게 모여 사는 동네라도 꺼리지 않고 어둡기만 하면 떼를 지어 다니면서 겁탈하였다.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아 가도 사람들은 모두 피하여 숨고 감히 잡지 못하였다. 더욱 간악하고 교활한 것은, 왕명을 받들었다고 일컬으면서 똑바로 인가에 들어가 보화와 재물을 빼앗아 가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허둥지둥 달아나 숨을 뿐 따져볼 수가 없으므로 매우 괴로워하였다.”(연산군 12년·1506년 2월 2일) ‘왕명을 사칭해도 따져볼 수도 없는 세상’임을 알지도 못하고, 다음 날 연산군은 또 이리 말한다. “듣건대 백운산(白雲山)에서 송이버섯이 난다 하니, 모두 금표 안에 들게 하라.” 백운산에 금표를 세우고 일곱 달 뒤 폭군은 폐위됐다. 칠공자와 폭군의 악연 대자동 금표는 그 폭정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증거다. 그런데 이 금표가 발견된 곳이 하필이면 연산군에게 폐족 당한 칠공자 가문 가족묘가 아닌가. 연산군 폐위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곧바로 칠공자 가문 신원을 회복시키고, 이들의 가문 묏자리로 준 땅이 바로 폭군의 사냥터, 고양 대자동이었다. 폐위와 함께 철거된 금표가 21세기를 6년 앞두고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부터 여섯 형제가 떼죽음을 당한 우산군 후손들은 지금까지 “원수의 비석을 철거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 중이다. 폭군 그 후 연산군은 폐위 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고 두 달 뒤 죽었다. 죽기 전에 ‘아내를 보고 싶다’고 했으나 원은 이루지 못했다. 교동에는 연산군 유배지가 두 군데 있다. 옮기며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기록이 없는 탓에 추정과 구전으로 두 군데가 서로 유배지라 주장한다는 말이다. 교동 어딘가에 있던 무덤은 8년 뒤 아내 거창 신씨 요청에 의해 서울 방학동에 있는 태종 후궁 조씨 묘역으로 이장됐다. 생전에 왕이라 불리지 못했고, 무덤도 왕릉이 아니라 묘(墓)다. 연산군 사돈 능성 구씨 가문에 이어 구씨 가문 사돈 덕수 이씨 문중에서 연산군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97년 발족한 연산군숭모회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예절교육과 세종대왕 한글 창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까지 연산군과 금표에 얽힌 이야기였다. ※박종인의 ‘땅의 역사’ 당분간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