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 영화평론가

누군가의 안부가 불현듯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약간의 수고를 감수해서라도 꼭 안부를 묻고 싶은 그런 사람. 제니퍼 로런스의 신작 소식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안부를 묻고 싶은 반가운 그 사람을 만났다. 제니퍼 로런스가 현재 촬영 중인 '레드 스패로'(Red Sparrow)는 전직 CIA 출신 작가 제이슨 매슈스의 스파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릴러 영화다. '레드 스패로'는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운용되는 여성 첩보학교로, 기밀을 빼내기 위해 육체를 이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다. 제니퍼 로런스는 미국 CIA에 접근해 이중 스파이 생활을 하는 러시아 스파이 도미니카를 연기한다. 냉전이 종식된 시기 물밑에서 진행되는 첩보 이야기라니, 조금 구태의연한 설정이 아닐까 내심 심드렁하게 소설을 들추다 보면 사실감 넘치는 묘사, 로맨스와 첩보의 환상적인 조합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은 덕분에 캐스팅 리스트를 꼼꼼히 훑어보던 중 반가운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영화 '댄서'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세르게이 폴루닌이다. 천재 발레리노로 영국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무대의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수석 무용수 자리를 박차고 나온 폴루닌. 영화 '댄서'에서 그는 '악동(bad boy)' 시절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동구에서 태어나 서구와 동구를 오가며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반추한다.

이 남자가 냉전 스파이물 '레드 스패로'에 출연하고 심지어 발레 장면까지 선보인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30여 년 전 영화 '백야'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환상적인 댄스 장면을 선보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기억도 스쳐갔다.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예술적 자유를 위해 망명을 선택했다"던 그 남자. 폴루닌과 바리시니코프는 동구에서 태어나 서구에서 폭넓은 예술적 자유를 실험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폴루닌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바리시니코프의 안부까지 궁금해졌다. 그의 사진 한 장을 얻겠다고 새벽부터 극장 앞에서 줄을 섰던 기억. 지금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반갑게 안부를 묻고 싶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