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혜 소설가

부산과 절영도(현재의 영도)는 단지 다리 하나 사이 거리다. 선조 30년(1597년) 2월 10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줄도 모르고 함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진격한 이순신은 절영도 해안에 3일간 머물면서 부산 왜영(倭營)을 치열하게 공격했다. 부산은 조선에 침공한 왜적의 본거지로 대규모 군영이 단단하고 즐비하게 건설돼 요새화된 곳이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전함에 올라 이순신 함대와 싸우지 못하고 전함을 모두 해안에 매어놓은 채 육지에서 총을 쏘며 대항했다. 이는 이순신 함대가 부산 앞바다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서 부산 진공작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그 대대적인 성공은 이후 조선 수군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부산 앞바다 진격은 매우 위험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던 선조와 조정의 두려움을 크게 경감시킨 결과, 수군 운영의 근본 전략이 되었다. 그래서 후임 통제사 원균에게도 같은 작전을 계속 추진하도록 강요했다. 원균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균은 부산 진공작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아닌 이순신이기에 성공했다는 것도 남김없이 깨닫고 있었다. 원균은 자신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진격한다는 건 너무 두려웠고 절대 출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선 수군이 부산에 진격하려면 육군 30만명을 소집해 함께 수륙병진작전을 펴야만 가능하다"는 이유를 대며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거짓 전공 보고 사건 이후 선조나 조정이 원균을 보는 눈은 매우 냉담하고 가혹해졌다. 원균이 전공의 징표로 조정에 올려 보낸 왜적 수급 47개가 하필 벌목하러 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들을 속여서 목을 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선조는 고니시와 짜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잡겠다는 가당찮은 욕심을 품었던 수준의 인간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받은 이중 충격이 그대로 원균을 향한 극렬한 증오로 변한 것이다. 취임 이래 줄곧 부산 출격의 독촉을 받으면서도 버티던 새 통제사 원균을 매우 가증스럽게 본 도원수 권율이 붙들어다 곤장까지 치면서 독촉하자 원균은 7월 15일에 드디어 출격했다. 그는 한산도 본영 함대를 모두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으나 왜군의 공격을 받아 출격 당일 밤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원균 자신도 전사했다. 당연히 한산도 통제영도 왜적의 손에 들어갔다.

한산도가 무너지자 선조와 조선의 조야는 공포에 휩싸였다. 곧 적의 대선단이 서해를 거슬러 올라와 한강을 통해 도성에 육박하는 걸 보는 듯 두려움에 떨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왕실 가족의 피란부터 챙겼다. 왕비는 수안(遂安)으로 후궁들은 성천(成川)으로 보냈다. 당연히 사대부 가문들도 줄을 이어 도성을 빠져나갔다.

그때 이순신은 남해 바다에서 묵묵히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남은 전선 불과 12척, 이순신도 선조처럼 일본군 대선단이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하리라고 확신했다. 단지 그가 선조와 그의 못난 신하들과 달랐던 것은 결코 그들처럼 도망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해 9월 16일, 이순신 함대는 전라우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서해로 향하는 일본군 대선단을 가로막았다. 적은 300여 척에 달하는 군세로서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간 1척 더 늘어 '13척'이 된 그의 함대가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당당하게 전투를 시작했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크게 기록될 '명량대첩'의 찬연한 신화를 이룩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명량대첩 전투 상보에는 뜻있는 후세인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대목이 있다. 대적에 압도돼 전투를 피하려는 부하를 향해서 그가 온몸으로 쏟아낸 절규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그 절규에는 사람의 영혼을 격동시키는 강력하고 장렬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 절규를 들은 부하로 하여금 극도로 불리한 전투에 절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그 절체절명의 처절한 위기에서 이순신이 높이 쳐든 가치가 '법(法)'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감동스럽다. 그렇다! 변덕스럽고 사람 목숨을 초개와 같이 알았던 경박한 임금의 통치 아래 살면서도 이순신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품었던 그런 선한 염원과 굳센 의지가 큰 기둥이 되고 강한 동력이 되어서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높이 떠올렸다.

'이순신'이라면 온 국민이 잘 아는 위대한 인물, 그런데도 아직도 그의 생애에 대한 기술에 왜곡이 많고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안이 많다. 그를 더욱 정확하게 알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