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장애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43)의 새 음반을 듣다가 두 번 울컥했다. 우선 집시 바이올린과 하모니카의 이중주로 편곡한 러시아 민요 '짙은 눈(Dark Eyes)'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소리를 내는 하모니카는 날렵함에서는 집시 바이올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처지다. 그런데도 전제덕의 하모니카는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집시 바이올린에 뒤질세라 부지런히 쫓아가며 '호각지세(互角之勢)'를 펼친다.

그는 이 노래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당시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가 열었던 '스리 테너(3 Tenors)' 공연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러시아 민요인 줄도 모르고 들었는데 우수 어린 단조의 '뽕끼(트로트풍)'가 우리 정서와도 잘 맞았죠. 대결보다는 대화하는 기분으로 연주했지만, 막상 하모니카로 바이올린을 쫓아가려면 저도 숨이 가쁜 건 사실이에요(웃음)."

두 번째는 1980년대 국내에서도 인기 있었던 영국 록 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부드러운 발라드 '왜 걱정해(Why Worry)'였다. 세상 시름을 모두 잊으라는 듯 현악 합주 위에 얹힌 하모니카가 시종 담담하고 소박하게 노래한다.

소리로 세상을 구분하는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씨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배구다. “오른쪽에서 스파이크를 때리면 왼쪽에서 받는 소리가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박진감 넘쳐요. 그래서 테니스와 탁구, 배드민턴까지 네트를 놓고 마주 보면서 하는 구기 종목들이 좋아요.”

2014년 이후 3년 만에 나온 전제덕의 5번째 독집은 '시간 여행'과도 같은 음반이다.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과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의 재즈 명곡과 인기 팝 음악을 담았다. 그는 "팝 가수 엘튼 존과 빌리 조엘과 다이어 스트레이츠 등 학창 시절 심야 라디오를 통해 즐겨 듣던 곡들을 골랐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물놀이에서 장구를 쳤지만, 1996년 벨기에 하모니카 명인 투츠 틸레망(1922~2016)의 곡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뒤 하모니카로 뒤늦게 '전향'했다. 스승 없는 철저한 독학. "기본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진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죠. 대신에 클래식과 재즈, 블루스와 팝 음악까지 좋아하는 곡을 맘껏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장점이었고. 단점이 곧 장점이었던 셈이에요."

점자 악보가 귀해서 악보를 구하기 힘든 곡들은 CD가 고장 날 때까지 수천 번씩 되돌려가면서 듣고 익혔다. LP가 손상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디지털 음반인 CD가 고장 난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처음 들었다. 한 달에 1~2개씩은 하모니카가 망가졌다. 지금까지 사들인 악기만 수백 개에 이른다. 전씨는 "지금은 요령이 생겨서 5~6개를 미리 구입해놓고 돌려가면서 연습한다. 연주용 악기는 별도로 보관하고…"라면서 웃었다.

2004년 첫 음반을 냈고 이듬해 첫 단독 공연을 열었다. 지난해에는 독일 최고의 하모니카 제작사인 호너(Hohner)의 공식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하모니카는 동요를 불기 위해 문구점에서 사는 교육용 악기라는 선입견도 그의 활동 덕분에 교정됐다. "하모니카는 보급용부터 베이스와 화음, 블루스와 반음계용까지 종류만 120여 개에 이르는 악기예요." 최근에는 하모니카 전공으로 대학 실용음악과에 합격하는 학생들도 늘었다.

하모니카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모두 소리가 나기 때문에 크기는 작지만 풍성한 화음을 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입으로 부는 오르간(mouth organ)'으로도 불린다. 전씨는 "바로 입 아래에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살살 불면서 연주하면 소리를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난다는 점도 하모니카의 인간적 매력"이라고 말했다. 8월 2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는 새 음반 출시를 기념하는 단독 콘서트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