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Kohl·87·사진) 전 독일 총리가 16일 오후 2시쯤(현지 시각) 루드비히스하펜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빌트지 등 독일 언론이 보도했다. 독일 기독민주당은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애도한다, RIP(Rest in peace: 평화롭게 잠들기를)"라며 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애도했다.

콜 전 총리는 1982년 서독의 마지막 총리로 취임해 1998년 통일 독일의 첫 총리로 퇴임하기까지 16년간 총리를 지냈다. 그는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민주화와 공산 정권 몰락 등의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독일 통일의 대업을 이끌었다.

콜 전 독일 총리는 1930년 루드비히스하펜에서 세무 공무원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기민당에 입당해 정치의 꿈을 키웠다. '유력 정치인'으로 본격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라인란트팔츠주(州) 주지사 때였다. 1969년 39세 나이로 주지사직에 취임해 7년 임기 동안 낙후했던 이 지역에 대학교를 유치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는 1973년 기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고, 9년 뒤 총선에서 승리하며 서독 총리에 올랐다.

콜 전 총리는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 공산 정권의 몰락과 민주화가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등 유럽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독일 통일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그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20여일 후 동서독이 국가연합체를 이룬 뒤 연방을 형성한다는 내용의 '10단계 통일 방안'을 발표하며 통독 작업의 주도권을 쥐었다.

1990년 10월 3일 콜은 40여년간 지속된 독일 분단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독일 통일의 날에 대해 "내 꿈이 완벽히 이루어졌다. 실로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통일 달성의 업적을 인정받은 콜은 1990년 통일 독일에서 치러진 첫 선거에서 압승하며 '첫 통일 독일 총리'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콜은 이후 조국의 통일에 쏟아부었던 열정과 경륜을 되살려 유럽 통합에 주력했다. 그는 1992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유럽 연합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해 '유럽 연합의 건축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러나 콜의 정치적 말년은 평탄치 못했다. 통일 독일 초반 높은 실업률과 동서독 간의 경제 격차 등 통일 휴유증에 따른 경제난에 시달렸다. 콜은 1998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후보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패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에는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리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총리 재임 시절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고 이 일로 기민당 명예총재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됐다. 콜은 2002년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다.

이후 가정과 건강에도 불행이 닥쳤다. 콜의 부인 하넬로레는 2001년 항생제 휴유증 등으로 심한 햇볕 알레르기를 앓아 은둔 생활을 하다 자살했다. 2008년 콜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가 됐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투병 중인 2008년 33세 연하인 마이케 리히터와 결혼했지만 전처 소생의 두 아들과는 관계가 소원해졌다. 2012년에는 심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뒤 은둔 생활을 해왔다.

콜 전 총리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도 인연이 깊다. 1991년 동독 과학자 출신의 메르켈을 통일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깜짝 발탁했다. 이 때문에 메르켈의 정치적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러나 1999년 콜이 비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메르켈은 그의 정계 은퇴를 공개 요구하며 압박했다. 결국 콜이 정계를 은퇴하자 "메르켈이 '정치적 양부(養父)'를 죽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