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안합니다."

12일 오후(현지 시각)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의 한 회의장에서 열린 보수당 하원 의원 모임 '1922 위원회'.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들어선 테리사 메이 총리는 총선에서 살아남은 보수당 의원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1922 위원회는 보수당 의원 중 장·차관 등 정부 보직을 맡고 있는 의원들을 제외한 일반 의원들이 매주 만나는 모임이다.

메이 총리는 독단적으로 조기 총선을 결정했다가 참패한 책임을 모두 인정하며 당내에 거세게 일고 있던 퇴진 요구를 잠재우려 안간힘을 썼다. 메이는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모두 내 책임"이라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여러분이 원할 때까지만 총리직에 남아 있겠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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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과 참석자들은 평소 강경하고 뻣뻣한 태도 탓에 '메이봇(메이+로봇)'으로 불렸던 메이가 이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일간 가디언은 "메이가 여러 차례 동료 의원들을 향해 사과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고 했다. 한 의원은 BBC에 "오늘 우린 메이봇이 아닌 한 인간을 봤다"고 했다. "메이는 깊이 참회했고, 진지한 모습이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메이는 1922 위원회를 계기로 벼랑 끝에서 살아나는 분위기라고 영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BBC는 "1922 위원회는 메이가 총리로 계속 남을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첫 시험대였다"면서 "이날 참석자 중 메이 퇴진을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강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도 메이 지지를 선언했다. 당장 메이를 끌어내릴 경우, 당이 혼란과 분열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컸다고 한다. 반면 일부 의원은 비공식 자리에서 여전히 "메이의 총리직은 시한부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메이가 살아남는다 해도 미래는 가시밭길이다. 이달 중 본격적으로 시작될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 전략도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메이는 그동안 "나쁜 협상보다 '노딜(no deal·깨지는 협상)'이 낫다"며 '하드 브렉시트'를 고집했다. 하드 브렉시트는 이민자 유입 통제를 위해 EU 단일 시장, 관세동맹과 완전 결별도 감수한다는 전략이다. 메이가 조기 총선 실시를 결정한 것도 하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야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총선에서 과반을 상실하면서 하드 브렉시트 전략은 급제동이 걸렸다.

보수당과 내각에서는 이민 분야에서 EU에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EU 단일 시장과 관세동맹 접근권을 보장받는 '소프트 브렉시트'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내각 내 2인자로 대표적인 소프트 브렉시트 주장자인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의 발언권이 몰라보게 강해졌다"고 했다. 해먼드 장관은 작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 잔류 진영의 핵심 인사로,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전략을 반대해온 인물이다.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보수당 의원 12명의 당선을 이끌어 당내 입지가 훨씬 커진 루스 데이비드슨 의원도 브렉시트 전략의 대폭 수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권은 제1 야당인 노동당과도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최근 정부 최고위 인사가 노동당 측과 비밀리에 만나 '소프트 브렉시트' 전략을 논의했다"고 했다.

한편 메이 총리는 총선 직후 총리실 내 최측근 2명을 경질했다. 이들은 평소 장관들조차 우습게 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고, 이번 총선 전략과 주요 공약 수립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은 "위기에 몰린 메이의 손발이 다 잘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