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만파식적(萬波息笛), 만 가지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다. 만사를 해결하는 그 피리는 신라 신문왕의 피리다. 신문왕은 당을 몰아내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 문무왕의 아들이다. 어느 날 그는 죽어서 용이 된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해 바닷가로 나가면 값으로 칠 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거란 얘기를 듣는다. 왕은 바닷가로 나가고 거북 머리처럼 생긴 섬 위에 대나무를 본다. 만파식적은 그 대나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옛날부터 만파식적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황당한 이야기가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그 이름 때문이었다. '만 가지 시름을 쉬게 하는 피리'가 있다니! 바람 일고 파도 치는 거친 세상살이에 지쳐 허우적거릴 때 이름만으로도 그것은 보물이었다.

무심히 불면 적이 물러가거나 병이 낫거나 날이 개는 피리, 신기하고 신비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만파식적을 얻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적병(敵兵)을 만나야 하는 걸까, 대나무는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맞아야 하는 걸까, 내 마음속의 용은 또 얼마나 긴 시간을 자기 욕망에 다치며 이무기의 시절을 겪어야 하는 걸까.

만파식적은 바다에서 온다. 그 바다는 '나'를 삼킬지도 모르는 막막한 바다, 무의식의 바다다. 그 바다는 어머니의 바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바다다, 아버지가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바다다. 어머니의 바다가 사랑과 욕망의 바다라면, 아버지의 바다는 수호와 사명의 바다, 결연한 의지의 바다다.

신문왕은 죽어서도 죽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염원을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아버지가 미처 완공하지 못한 감은사를 완공하고, 금당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다. 용이 된 아버지를 지상으로 부르는 길, 아버지의 염원이 흐르는 길이다. 신문왕의 의지는 그렇게 아버지의 염원에 잇대 있었다.

당신의 꿈은 어디서 오는가. 아버지 혹은 '아버지'라 부르고 싶은 꿈의 대부(代父), 의지의 대부가 있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헬기 조종사 피우진 보훈처장을 보면 아버지의 딸로서의 의지가 보인다. 그녀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성장했는지도. 그녀의 꿈과 끈기와 용맹함 속에서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의지에 잇대 있는 그것이 바로 '효도'의 정신 아닐까. 사실 효도라는 말은 전근대적인 말이다. 그래서 효도가 명령이나 강요나 맹목이 되면 숨이 막힌다. 그러나 부모의 꿈과 경험을 존중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삶은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 부모는 우리의 뿌리이고 전생이기 때문이다. 거기,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에게는 나의 꿈, 나의 절망, 나의 열정의 씨앗이 있다. 그것을 돌보지 않고 어찌 만 가지 시름을 쉬게 하는 피리를 얻을 것인가.

그 피리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로 만들어졌단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그 대나무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세상은 혼돈한 어둠에 잠겨버렸다(…)어둠의 상태는 7일간 계속되었다.'

희한하다. 낮에 둘이었다가 밤에 하나가 되는 대나무가 정오에 하나가 되었다니. 당연히 오시(午時)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겠다. 정오는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된 시간, 깨달음의 시간이다. 그러고 나서도 대나무는 7일의 어둠을 견뎌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현자가 깨달은 후 보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만파식적이 될 수 있는 대나무로 거듭나는 날의 수, 7은 변화의 수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수이고,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시가 영생을 얻기 위해 깨어 있어야 했던 날의 수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며 단단해져야 넉넉한 소리가 나온다. 어둠의 시간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