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혜 소설가

선조 30년(1597년) 정유년 2월에 부산 진공 작전을 마치고 한산도로 귀대하던 중 체포된 이순신이 새 통제사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서울을 향해 출발한 날은 26일이고, 서울에 도착한 날은 3월 4일이었다. 또한 그가 의금부 감옥에서 석방된 날은 4월 1일. 그 '27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조는 그간 명과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가 깨지고 왜란이 다시 발발할 게 확실해지자, 임진년 때처럼 왜군이 급속도로 도성으로 쳐 올라와서 자신을 포로로 잡을까 봐 크게 겁먹었다. 그래서 황급하게 달아날 계책부터 세웠는데, 적의 대군이 미처 부산에 상륙하기도 전에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떠날 정당한 핑계를 만들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내세운 것이 "전에 해주의 산에 임시로 묻은 아이의 태(胎)를 살펴보러 반드시 가야겠다"는 것이었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1월 12일, 13일) 신하들은 선조가 너무도 황당한 핑계를 대고 도성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보고 전쟁 상황 전체에 치명적 악영향을 미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그런 사태를 막고자 "정 그러면 강화도로 들어가시라"고 강권했다. 그러나 선조는 강화도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주로 가는 것이 전시 상황이 급하게 위태해질 경우보다 쉽고 빠르게 북쪽으로 달아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는 날을 알려줄 테니 매복했다가 잡으라"는 요시라의 반간계가 전해졌고, 선조는 그것이 결정적인 큰 구원책이 될 것으로 여기고 크게 반겼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이 그 계책에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를 향한 증오와 저주의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조선 수군 전체를 통솔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최고 지휘관이면서도 임금으로 하여금 다시 몽진(蒙塵)을 계획하게 하는 불충한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순신이 시행한다는 부산 진공 작전까지 모두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이순신이 부산에 싸우러 가 있는 동안 그를 숙청하고 원균을 새 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은 장수이며, 이순신이 원균의 전공을 가로챘다"고 주장하는 원균 지지파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선조는 이제는 필요 없어진 이순신을 붙잡아 반드시 죽이려고 결심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순신이 의금부 감옥에 투옥돼 있던 선조 30년 3월 13일, 선조는 이순신의 죄명(罪名)을 직접 정해서 발표했다. 그날 선조가 정해준 이순신의 죄목은 세 가지였다. 첫째,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무시한 죄(부산 왜영 화재 사건 관련자).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요시라 반간계). 셋째, 남의 공을 뺏고 죄를 씌운 죄(원균의 나이 많은 아들을 어리다고 하여 전공을 가렸다는 주장). 선조는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고문을 가하여 실상을 캐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세 가지 죄의 내용을 고증해 보면, 모두 이순신에게 몹시 억울한 누명이었다. 어쨌든 당시 사법제도상 신하로서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죄목에 걸리면 반드시 '사형'에 처하게 돼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조가 굳이 그런 죄목을 붙인 것이다. 정탁의 '신구차(伸救箚·살려주기를 비는 간략한 형식의 상소문)'를 보면 이순신이 고문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3월 14일부터 3월 30일 사이에 고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조는 "반드시 이순신을 죽이겠다"고 공표한 지 보름도 안 돼 이순신에게 무관에게 가하는 처벌 중 가장 가벼운 '백의종군' 처분을 내리고 석방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조정 중신인 정탁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 올린 '신구차' 때문에 살아났다"는 설명이 대세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집'에서 확인해 보면, 그 '신구차'는 정식 명칭이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이순신을 논하여 구하려는 상소문)'로서 문집에 전문이 수록돼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장 위에 "임금에게 올리지는 않았다"고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선조가 받아본 일도 없는 '신구차' 때문에 '반드시 죽이겠다고 공언한 신하'를 살려줄 턱이 있는가!

꼼짝없이 죽을 구렁에 빠졌던 이순신이 살아난 실제 이유는 선조 30년 3월 24일에 조정에 도착한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승첩 장계(狀啓) 때문이었다. 2월 26일에 임무를 시작한 원균은 3월 9일에 거제도 앞바다에서 적선 3척을 깨뜨렸다면서 적의 수급 47급을 올려보냈다. 선조는 "원균이 명을 받자마자 무용(武勇)을 나타냈다"고 매우 기뻐하며 포상을 지시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건 실제 전투에서 거둔 전공이 아니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허락을 받고 거제도에 벌목하러 간 왜군을 좋은 말로 유인해 안심시킨 뒤 바다에서 몰살해서 목을 벤 것이었다. 겁이 많은 자는 눈치도 빠른 법이다. 그 사건을 접한 선조는 자신이 지닌 '이순신 평가'가 큰 오류일 수 있음을 번개같이 깨닫고 급히 처형 계획을 취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