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의 적절한 호칭은 '영부인'
'여사', '씨'는 낮춤말의 의미 내포하고 있어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은 '여사'란 호칭 자제 요청
일부 관료 아내는 '사모님'이란 호칭에 알레르기 일으키기도
여성 모임에 가면 좌장이 누구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발언 시간이나 주도권이 1/n로 공평한 경우가 많아서다. 반면에 남성모임에 가면 넘버원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 발언권과 시간이 서열 순으로 배정되기 때문이다. 임원회의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꿔다놓은 보릿자루’ 부장이 부서회의에 와서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남성리더에게 회의 언변은 말솜씨가 아니라 서열이 좌우한다. 남자는 권력을 드러내야 존중받는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여성은 권력을 숨겨야 미움을 받지 않는다고 느낀다.
◆ 남성호칭은 ‘부력의 법칙’ 여성호칭은 ‘중력의 법칙’
남녀차이는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호칭은 사회적 위치와 의식의 반영이다. 사회적 관계와 위계의 지표인 것이다. 남성들은 나이, 직책 등 위계질서 중심으로 호칭이 달라진다(때로 남성중심 기업문화의 회사에선 호봉과 상관없이 ‘직급인상’의 호칭인플레가 포상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남성호칭에 연공서열의 법칙 하나만 적용된다면 여성호칭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작용한다.
‘호칭 중력의 법칙’과 ‘삼종지도의 법칙’이 그것이다. 호칭중력의 법칙은 실제호칭보다 한 단계 이상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삼종지도의 법칙’은 아버지, 남편, 자식과 관련된 호칭으로 여전히 인생의 3막이 나뉘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 호칭에는 실체보다 넘치게 하는 ‘부력의 법칙’을 적용한다. 반면 여성에겐 끌어내리는 ‘중력의 법칙’이 작동한다. 여성리더들이 유독 자신의 호칭을 특정하게 불러달라고 별도의 ‘투쟁’내지 ‘청탁’을 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서구사회도 여성호칭 논란은 비슷해
내가 아는 모 전직총리부인은 ‘사모님’이란 호칭에 알레르기를 보였다. 초면에 만나면 명함을 주며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미리 청하곤 했다. 남편 후광에 업혀가기 싫다는 나름의 독자선언이었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도 현직시절, ‘여사’란 호칭 말고 ‘관장’으로 불러달라고 공식 요청한 바 있다. 이후 언론보도에서 홍 여사란 호칭이 여전히 지속된 것을 보면 그리 유효했던 것은 같지 않다. 여성호칭에 있어서 미국 등 서구라고 선진적인 것만은 아니다. 힐러리 후보의 대선 유세시절, 언론에서 클린턴이란 성 대신 힐러리란 이름으로 통칭하는 것은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란 지적의 소리가 높았다.
힐러리는 남편인 클린턴 전 대통령과 혼동되니 이름으로 부른다 치자. 다른 여성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남성정치인들과는 달리 언론에서 ‘이름’으로 맞먹어 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남성중심 문화의 반영이란 비판의 소리였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 호칭과 관련한 논란이 있었다. 처음 출발은 청와대가 “영부인이 아닌 여사님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데서 출발했다. 김정숙 여사를 하나의 독립적 인격으로 보는 의미가 있다는 배경설명이었다.
이에 몇몇 언론사가 내부표기방침을 이유로 ‘김정숙씨’라고 표기하자 네티즌들이 ‘무례하다’는 반발이 잇따르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필자는 이번 논란을 우리 사회 내 여성 호칭 정립 공론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영부인, 여사와 씨, 각각의 의미를 알아보자.
◆ ‘영부인’, ‘여사’, ‘씨’의 차이는?
영부인의 의미를 알아보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영부인(令夫人)은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처를 지칭할 땐 ‘아내’, 남의 처를 높여 말할 땐 부인이 적합한 호칭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현 총리 부인인 아베 아키에(安倍昭惠) 여사를 아키에 씨, 아키에 부인 등으로 부른다. 직함이 반드시 필요할 경우에는 아키에 총리 부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영(令)은 남을 높인다는 의미의 접두어이다. 꼭 대통령 부인이 아니더라도 존칭으로 쓰이던 말인데, 이승만 정부 때부터 대통령부인에 제한해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서양에서 선출직 국가원수의 부인을 뜻하는 ‘더 퍼스트 레이디’ ‘미세스 프레지던트’의 번역에 가장 가깝다.
다음으로 여사(女史)를 알아보자. 사전적 정의는 결혼한 여자를 높이거나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여사의 어원은 고대 중국의 여자 관직명칭에서 유래했다. 황후가 행하는 의식을 대신하거나, 기록사무를 다루는 여성 관리의 지칭이었다. 말하자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텔리 궁녀였다. 여류명사에 대한 경칭으로 쓰인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오늘날, 여사는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모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비정규직 일용 여성근로자를 비하하는 호칭으로 사용돼 사회적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일반인들이 개념 없는 여성운전자를 가리킬 때 ‘김여사’라 표현하는 것도 낮춰 쓰는 사례다. 일본에선 상사가 여성사원들에게 “여사”를 붙여 그 능력 등이 미치지 못함을 비아냥거릴 때도 사용한다. 일본의 교도통신사에서 발행한 기자용 보도용어집이나 에센스 핸드북 등에는 ‘성차별’ 항목에 “여사”라는 단어가 기재되어 있을 정도다.
끝으로 씨(氏)에는 어떤 뜻이 담겨있는가. 초기발생단계에서 성과 씨는 구분돼 사용됐다.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며,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다. 오늘날처럼 혼용된 것은 춘추전국 시대 이후다. 씨의 본래의미와 상관없이 가치추락하고 있는 호칭이다. 씨는 더 이상 경칭이 아니다. 호칭은 사전적 정의를 넘어 사회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직장에서 하위자가 상급자에게 000씨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나 생각해보면 짐작하기 쉽다. 대구대의 이정복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보도방송에서도 고위관료나 정치인, 기업인 등은 ‘이름+직위’방식으로 불린다. 이름+씨의 방식으로 불리는 경우는 특별한 직위가 없는 일반인, 고위직 인물이 범죄인이 되었을 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상의 논거로 볼 때 필자는 대통령부인의 지칭으로 ‘씨’나 ‘여사’보다는 영부인이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번 호칭 논란을 두고 ‘현대판 예송논쟁’이라며 비판한다. 또는 본인이 좋은 대로 부르면 그만이라며 호칭이 대수냐고 말한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수에 넘치는 호칭도 비례(非禮)이지만 걸맞지 않는 호칭 역시 비례이다. 올바른 호칭은 위계뿐 아니라 관계의 윤활유가 된다. 적절한 존칭은 허례허식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기본매너다.
◆ 리더십 스토리텔러 김성회는 ‘CEO 리더십 연구소’ 소장이다. 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석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언론인 출신으로 각 분야 리더와 CEO를 인터뷰했다. 인문학과 경영학, 이론과 현장을 두루 섭렵한 ‘통섭 스펙’을 바탕으로 동양 고전과 오늘날의 현장을 생생한 이야기로 엮어 글로 쓰고 강의로 전달해왔다. 저서로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 ‘성공하는 CEO의 습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