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식 부국장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문제는 해묵은 현안이다. 한·미가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만 따져도 벌써 1년이 다 됐다. 그 사이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딱부러지게 사드에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늘 ‘사드 배치 재검토’ ‘국민적 공론화와 국회 비준’ 같은 표현으로 사드에 대한 찬반 입장을 대신했다. 문 대통령은 그렇게 애매하게 넘어가는 것이 괜찮은 선거 전략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드에 결사반대하는 문 대통령 지지층과 문 대통령의 안보관을 불안하게 여기는 보수 성향 유권자들 사이에서 굳이 화약을 머리에 이고 불 속에 뛰어들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사드를 놓고 첨예하게 맞붙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까지 감안하면 적당히 에둘러가는 것이 낫다고 본 듯하다. 문 대통령은 이것을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다. 그러면서 “외교적으로 사드를 해결해 안보와 국익을 지켜낼 복안(腹案)이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말했던 그 복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른바 ‘국방부의 사드 보고(報告) 누락 사건’을 통해서다. 이 사건의 골자는 국방부가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들에게 사드 발사대 6기 중 기왕에 공개된 2기 외에 4기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사대 6기로 이뤄진 사드 1개 포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내용이다. 유독 청와대만 이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이 일을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 격노했다’고 한다. 이런 소란에 비하면 엊그제 청와대가 내놓은 진상 조사 결과는 싱겁기 짝이 없다. 국방부 정책실장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대신 청와대는 국방부가 ‘적당히’ 넘어가려 했던 사드 배치와 관련한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하겠다고 나섰다. 최소 1년이 걸리는 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사드 배치 완료가 언제 이뤄질지 기약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국방부는 문 대통령의 사드 복안을 꺼내 드는 데 필요한 소품(小品)에 불과했다. 여기까지는 청와대 뜻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번 소동을 거치면서 사드 배치를 바라보는 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부정적 인식은 주지의 사실이 돼 버렸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만난 딕 더빈 미국 상원 의원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를 만났던 한 관계자는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 정치인 중에서 더빈 의원만큼 기분이 상해서 나온 사람은 처음 봤다”고 전했다. 더빈 의원은 청와대 방문 다음 날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를 원치 않는다면 예산 9억2300만달러(약 1조300억원)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미국의 야당인 민주당 소속이다. 미국 야당 의원까지 ‘한국이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왜 1조원에 이르는 미국인 세금을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31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예방한 딕 더빈 美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와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사드 추가배치는 환경영향평가 끝나야"]

청와대는 애초에 더빈 의원의 발언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문재인 정부는 미국 시민들이 의아해하고, 미국의 국익(國益)과 방향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인가? 문 대통령의 사드 해법이 한·미 동맹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면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 한국의 조치에 고개를 끄덕이고, 미국의 조야(朝野)가 '문(文) 정부가 가는 길이 미국 국익에도 부합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머지않아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 전 세계 정상들은 트럼프와 첫 회담을 앞두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일본 아베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독일 메르켈 총리까지 모두 그랬다. 트럼프 대통령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세계 안보·경제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 때문이다. 그러나 문 정부는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주한 미군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사드 배치 연기 결정을 내렸다. 청와대 관계자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선의(善意)와 진정성을 갖고 대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 정부의 전신 격인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북아 균형자’를 외교 기조로 내세웠다가 낭패를 봤다. 그때도 ‘선의와 진정성’을 앞세운 이상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국은 한·미 동맹을 ‘이혼을 앞둔 부부’로 여겼고, 중국은 한반도 역사를 왜곡한 ‘동북 공정’에 박차를 가했다. 문 정부는 한국 외교에 그토록 큰 시련을 안겨줬던 그 미지의 길을 굳이 다시 가겠다고 나선 것인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