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혜 소설가

임진왜란 시기에 벌어졌던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해전(海戰)에서 가장 빛나는 승첩은 명량대첩이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실행했던 대일 전략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발발 다음 해인 선조 26년(1593년·계사년) 7월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本營)을 일본군과 일본 전함이 우글거리는 경상좌도 바닷속의 한산도로 옮긴 것이다.

당시 여건은 이순신 함대에 매우 불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듭된 잔인한 명령에 따라 일본군 9만3000명이 동원되어 선조 26년 6월에 경상우도의 진주성을 공격해 10일간 처절한 공방전을 벌인 결과 '6월 29일 진주성 함락, 성 안 조선인 6만명 도륙'이라는 매우 충격적 상황이 발생했다. 그에 이어 승전한 일본군이 육지로 전라도를 침공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순신의 관할 지역인 순천과 낙안 등의 고을은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전라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모두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서 아예 텅 빈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 수군을 치려고 경상우도 바다에 나가 있던 이순신은 자기 임지의 그런 상황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전라좌도의 여수에 본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임지를 지키려고 황급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이순신이 선택한 전략은 전혀 달랐다. 그는 임지 대신 오히려 경상우도 바다 안으로 더욱 전진해 들어가서 거제도 옆에 있는 섬 한산도에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설치했다. 한산도는 일본군의 침공 이래 적의 본거지가 된 부산과 가까운 곳이다. 게다가 바다 주변 연안은 모두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따라서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한다는 것은 적진 한가운데 뛰어드는 것처럼 과감한 일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전라도 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의 목을 누르고 손발을 묶는 당찬 전략에 해당했다. 타고난 군신(軍神)과 같은 지도자적 안목과 감각과 담략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전략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순신이 그처럼 담대한 전략을 세운 것은 시기상 진주성 함락 직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조정에 알리고 승인을 요청했다. 선조가 원한 것이 바로 그런 과감한 전술이었다. 당연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조의 허가가 도달하는 동안 진주성 함락이 있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여건이 매우 악화되었다고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에 있었다. 그는 소신대로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고 한산도 본영은 곧 매우 강력하고 유용한 요새로 조선 수군 운용의 중심이 되었다. 후일 선조가 이순신을 숙청하고 원균을 새 통제사로 임명할 때까지 한산도에 웅거한 이순신의 막강한 수영(水營)에 막힌 일본 수군은 아예 전라도 쪽을 넘보지 못했다.

한산도 진영은 여러 측면에서 문자 그대로 '신의 한 수'에 해당했다. 대외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왜적을 막아내는 방편이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는 길을 열었다. 그간 원균을 동급의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견제용으로 쓰던 선조가 적진 한가운데 군영을 설치한 이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서 다음 달인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이순신을 임명하여 수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것은 원균의 행패와 비리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었다. 전란 발발 초기 적이 오기 전에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무너뜨린 죄과가 있는 원균은 그것을 만회하려고 선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비리를 일삼았다. 경상우도 바다에 구원군으로 출격한 이순신 함대가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우면 원균과 그의 수하는 바닷물에 떠오른 적의 시체를 건져서 머리를 베어 자기들의 전공으로 삼거나 이순신의 수하 장수가 잡은 왜선을 빼앗으려고 같은 편을 향해 활까지 쏘아 부상을 입혔다. 그런 행위는 이순신 함대의 전투 의욕과 사기와 힘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어서 이순신은 첫 전투 보고서인 장계(狀啓) '옥포파왜병장'에서부터 원균 측의 비리와 악행을 적시하여 알렸다. 그런데도 선조는 그런 상황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전공은 적의 수급을 기준으로 정한다"면서 이순신을 억눌렀다. 선조는 신하가 자기를 전공 문제로 속일까 봐 전쟁 수행 자체에 막중한 해악을 끼치는 미친 짓을 계속한 것이다. 그런 세월이 장장 1년 2개월간 계속된 뒤 그는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을 수군 최고 지휘관인 통제사로 만들었다.

당시 이순신은 그런 통치자 선조를 어떻게 봤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간접 자료가 있다. 선조는 임진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가 승리를 거두면 얼른얼른 포상했다. 다른 조선군에게 자극과 격려가 되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옥포승첩을 거두자 '가선대부(종2품)'로 품계를 올려주고, 당포승첩에는 '자헌대부(정2품)'를 주었다. 한산대첩 때는 '정헌대부(정2품)'로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 8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주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아예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이 진정한 통치자답지 않은 임금 선조에 대한 실망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듯하다.